가을이 무르익은 요즘, 유치원마다 현장체험학습이 한창이다. 우리 유치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을 나들이를 계획했고, 처음 생각했던 장소를 답사해 보니 아쉬운 점들이 있어 인천 서구의 국립생물자원관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국립생물자원관은 환경부 소속 기관으로 생물자원에 대한 전시 외에도 보전, 이용에 대한 연구가 함께 이루어지는 곳이다. 전시 벽면 한쪽에 '지구상의 생물 중 어느 한 종을 잃는 것은 비행기 날개에 달린 나사못을 빼는 것과 같다.'라는 노벨수상자인 독일 미생물학자파울 에를리히의 말이 적혀있었다.국립생물자원관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국립생물자원관의 전경과 야외풍경>
<전시관 입구에 적혀있는 인용문>
전시관 천정에는 커다란 두루미(모형)들이 날아다니고 제주 곶자왈처럼 난대성 식물로 조성해 놓은 실내온실을 경사로 형태로 구성해 놓은 것도 매력적이었다. 가족 단위로 이동하는 천연기념물 두루미 가족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어도 좋았을 법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동식물을 볼 수 있으니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인천 서구에 사는 아이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웹상으로 온라인전시관(국립생물자원관 Google Arts & Culture)을 볼 수 있으니 이후에 가족 단위로 방문해하고자 한다면 사전에 먼저 살펴보고 가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차 안에서는 '인내'와 '다독임'의 작은 승부가 시작된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1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차 안에서는 '인내'와 '다독임'의 작은 승부가 시작된다.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이 "선생님, 언제 내려요?"라는 아이들의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선생님은 "조금만 더 가면 돼요."라며 아직 30분이나 남은 시간을 달래 본다. 차가 밀려 1시간 20분이나 걸렸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의 '조금만, 조금만' 주문에 잘도 참아주었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은 "저기 봐! 공사차가 몇 대일까? 같이 세어볼까? 하나, 둘, 셋..." 하며 창문 밖을 가리키며 즉석에서 숫자 놀이나 끝말잇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국립생물자원관에 도착해 보니 여기저기서 온 아이들로 국립생물자원관은 활기가 넘쳤다. 초등학생들은 사마귀처럼 긴 다리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는데, 2~3살 어린이집 아이들은 선생님 손을 꼭 잡고 낮은 계단도 조심조심내려온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숨죽여 보게 되고 발을 내려놓기 전과 후 아이 표정 변화가 너무 귀여워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유치원 아이들은 또 어떤지. 줄을 맞춰 서라고 해도 자꾸만 옆으로 삐져나와 어느새 강강술래 대형이 된다. 안전을 위해 줄 서기를 가르쳐야 하지만, 오늘처럼 특별한 날에는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거닐게 해 주면 어떨까 싶어 굳이 닦달하지 않았다. 앞사람 머리만 바라보며 걷는 게 얼마나 답답할까? 둘레둘레 여기저기 보면서 날아가는 새도 보고 바람에 떨어져 나온 나뭇잎도 줍고 싶은 게 아이들의 마음일 테니. 나이가 주는 여유 때문인지 아이들의 마음을 한번 더 헤아려보게 되는 것 같다. 활동 중에 아이들이 줄을 맞춰 이동하는 건 지켜야 할 약속이지만, 이런 제약이 때론 아이들의 자유로운 탐색과 발견의 기쁨을 막는 건 아닌지 늘 고민된다.
코로나가 끝나고 현장체험학습을 재개하면서도 여전히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사전답사를 했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현장체험학습을 갈 때는 흥분되는 마음 한편에 늘 긴장이 가라앉아있다. 차량을 이용하여 외부로 현장체험학습을 가는 것은 분명 즐겁고 신나는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안전상 아이들의 시선에서 다시 바라봐야 한다. 층별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 연령에 따라 관람 범위와 동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관람 중간에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는지, 아이들 수준에 어렵거나 관심이 적어 건너뛸 만한 것이 있는지 등을 가려야 한다.
경기도 기준으로 유치원 연령별 학급당 인원은 3세 14명, 4세 20명, 5세 24명이다. 아이들을 두 줄로 세워도 선생님 곁에 있는 아이들만 설명을 듣지, 뒤쪽 아이들에겐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더구나 아이들의 시선은 늘 분주하다. 두리번두리번 세상 구경하기 바쁜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설명은 가을바람처럼 둥둥 떠다닐 뿐이다. 뒤에서 보조하는 선생님은 마치 양 떼 모는 목동이 된 듯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줄을 이탈하는 아이도 붙잡고,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는 아이도 데리고 가야 하고, 중간중간 단체 사진도 찍어주면서 현장학습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하느라 정신없는 하루다.
점심시간, 전시관을 빠져나오려는데 갑자기 "더 보고 싶어요!"를 외치며 한 아이가 전시관으로 다시 질주한다. 아이를 쫓아 달리다 보니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이래서 달리기를 배워두길 잘했다:) 가족들과 함께였다면 아이의 걸음 속도에 맞추고, 흥미 있어하는 곳에선 실컷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단체 활동이다 보니 그런 섬세한 배려는 꿈도 못 꾼다.
"이거 진짜예요, 가짜예요?"
국립생물자원관의 전시물들이 너무나 실감 나게 전시되어 있었는지, 한 아이가 자원봉사자 선생님께 묻는다. "이거 진짜예요, 가짜예요?" 너무 생생해서 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나 보다. 자원봉사자 선생님은 진짜라고 말씀하시며 미소 지으셨다. 세상 경험이 아직 적은 아이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려 애쓰는 모습이 귀여우셨나 보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새, 새둥지를 틀다'라는 기획전시였다. 이 전시는 '둥지로부터 배우다'를 비롯하여 관련 도서에 기반하였음과전시 기획부터 설치한 사람의 이름을 벽면에 게시하여 그 책임과 노고를 기억해 두려는 듯했다. 입구에 쓰여있던 글귀가 아직도 생생하다. '새들은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지만 본능에 따라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그 글귀처럼, 전시장에는 크고 작은 둥지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었다.주어진 환경에서 삶의 터전을 만들어내는 새들로부터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낀다.
<뱁새의 알 색깔의 변화에 얽힌 이야기>
<주어진 환경에서 삶의 터전을 만드는 새>
오늘은 이만큼, 내일은 저만큼, 차근차근 넓혀가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현장학습의 모습이다.
누군가둥지를 가리키며 "여기 봐요, 이 둥지는 이렇게 크고, 이건 작지?"라고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걸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전시에는 더 깊은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새들은 저마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고, 때로는 천적의 위협도 받고, 척박한 환경과도 싸워야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푸라기든, 비닐이든, 노끈이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들려주려면 어떻게 할까. 국립생물자원관이 전하고 싶었던 생명의 다양성과 존엄성이 바로 이런 작은 둥지들 속에 숨어 있었다.많은 것을 스쳐 지나가는 것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배움이 아닐까. 오늘은 이만큼, 내일은 저만큼, 차근차근 넓혀가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현장학습의 모습이다.
<터치스크린 형태의 아카이브> <새둥지 실물 전시>
확실히 밖에 나와 햇살도 쬐고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이들도 평소와 다른 공간에서 즐거워하고, 가방 속 엄마표 도시락까지 있으니 오늘이 특별한 날임을 아는지 들뜬 표정이다. 평소와는 다른 예쁜 김밥, 정성스레 모양낸 과일, 다채로운 간식거리들을 보고 있으면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을 위해 분주히 준비하셨을 부모님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지만 도시락을 펼쳐놓고 보면 살짝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특별한 날이라고 이것저것 조금씩 넣다 보니 아이의 식사량과는 무관하게 양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현장체험학습 날 아이들의 가방은 마치 군인들의 행군 가방처럼 묵직하다.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한 조각이라도 더 먹이려 애쓰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정작 아이들의 관심은 도시락보다는 과자에 가 있다.
유치원의 현장체험학습은 중고등학교 수학여행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단순히 친구들과 추억을 쌓는 시간을 넘어, 새로운 경험에 들떠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도 융통성 있게 조절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아이들을 지켜보는 선생님의 시선이 분주하다. 일부러 멀리까지 현장체험학습을 왔는데도 정작 아이들 기억에 남는 건 앞사람 따라 줄 서느라 불편했던 순간이나 도시락 시간뿐이라면, 교사로서 마음 한편이 씁쓸해진다. 많은 부모님들이 빈번한 현장체험학습이 곧 풍부한 경험이라 믿지만, 과연 그 경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의 연장선상에서 현장체험학습이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대단위 학급이 있는 유치원에서는 사실상 그렇게 하기 어렵고 한 장소로 통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교실에서 진행하는 주제와 동떨어진다른 경험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너무 멀리서 찾는 거 아닐까? 현장체험학습>
어쩌면 진정한 현장체험학습은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매일 지나치던 평범한 곳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는 것, 너무나 익숙해서 스쳐 지나갔던 것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현장체험학습이 아닐까. 현장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어야 하고, 의미 있는 체험이 되려면 낯선 것과 익숙한 것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결국 현장체험학습의 진정한 가치는 멋진 시설이나 화려한 활동이 아니라,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호기심과 관심을 끌어내는 데 있다. 무엇을 새롭게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어떻게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찾아야 할 현장체험학습의 참된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