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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일 Sep 08. 2019

[걸어서 동네속으로] 그렇게 짧은 여행은 시작된다.

여행 이후의 여행

"당신이 얼마나 먼 곳을 여행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통 멀리 여행할수록 결과는 나쁠 뿐이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차리는지가 중요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여행은 일상의 작은 틈 사이에서 시작된다. 출퇴근길의 숨 막히는 인파 틈에서, 상사의 크고 작은 잔소리를 듣고 찌푸린 얼굴로 일탈을 꿈꾼다. 그 사소한 삶의 생채기에서 늘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꾸는 것 같다. 졸업 후에는 더 그렇다. 적금과 커리어, 꿈만큼이나 중요한 현실의 문제로 스스로를 책임지기 바쁘다. 이렇게 어른이 되는 걸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자유롭게 떠날 수만은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다.


떠나는 것은 어렵다. 떠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시간이나 여유가 필요하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잘 길들여진 일상에 굿바이 하는 일마저도 어려우니까. '젊을 때 많이 떠나보라'며 충고해주던 아버지 말씀처럼 보통의 삶을 사는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해외를 여행할 수 있을까?


여행을 다시 정의 내리기


꿈만 같던 여행을 자유로이 떠날 수 없다는 건 슬픈 사실이다. 돈이 모이지 않는 이상 멀리 떠나긴 힘들겠지. 하지만 여행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이탈리아에서 내게 영감을 줬던 것이 간판과 화장실인 것처럼, 나는 서울에서도 사소한 것들을 보며 여행하는 기분을 느낀다.


서울에서의 첫 여행이 시작된 것은 어느 봄날, 아르바이트를 마친 오후 여섯 시쯤의 광화문에서였다. 그날따라 바람이 정말 시원했고, 내내 갇혀있다가 푸른 하늘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나는 가보지 않았던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는 빌딩 숲, 네온사인 가득한 거리가 혐오스러웠다. 도시인으로 태어나 도시가 싫었고, 시멘트 빛에 질릴 대로 질려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탈리아를 다녀온 뒤로 이탈리아 사람이 됐는지 돌연 이 빌딩 숲이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장과 굳은 표정을 입고 부지런히 걸어 다니는 직장인들을 여행객의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바빴던 하루의 피로가 싹 내려가는 듯했다. 퇴근 후의 짧은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모르는 곳을 여행하는 여행자의 호기심으로 무장한 채, 나는 경복궁 역에 도착해 가본 적 없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통 경복궁에 오는 사람들이 서촌이라 불리는, 상권이 밀집된 지역에 간다면 나는 사직단을 너머 사직동으로 향했다. 평소 가보지 않았던 길을 택하는 건 쉽다. 버스를 타고 다닐 때, 약속 장소에 갈 때 '이 골목 뒤에는 뭐가 있을까?' 하는 탐험가의 호기심을 버리지 않고 있으면 된다. 마침내 호기심으로 가득한 새로운 동네, 새로운 골목을 탐색하게 되면 잠들어있던 보는 능력과 모험가의 자유로움이 되살아난다. 이렇게 나는 종로의 길 박사가 되어가고 있다.

퇴근 후의 첫 여행이 시작된 것은 어느 봄날이었다. 위쪽으로 더 올라가면 인왕산 전망대가 나온다고 한다. 이 풍경만 놓고 보면 서울 중심부가 아닌 것 같다. 차와 직장인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대로변에 을 꺾어 2-3분 남짓 걸어 올라갔을 뿐인데 이렇게 달라진 풍경이 나온다. 여행은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을 한 꺼풀 벗겨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만든다.

인왕산 둘러보기를 포기하고 내려가다 보니 사직단 뒤편에 작은 공터가 있었다. '인왕산 배드민턴 클럽', 이런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던가?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아저씨들이 중학생들처럼 족구 하는 사이,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곳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서촌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현지인이 되기는 아직 멀었나 보다.

이제 진짜 서촌방향으로 걸어간다. 사직단 담장 너머로 종로의 빌딩 숲이 보인다. 빌딩은 저마다 다른 높낮이를 하고 있어 꽤나 입체감이 선명하다. 검은 기와지붕, 푸른 나무, 그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빌딩의 유리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가 아닐까? 게다가 여유로운 탐험가, 여행자의 시선으로 시시각각 바쁜 템포로 돌아가는 저 빌딩 숲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어떤 평화마저 찾아오는 듯하다. 그들과 달리 나는 급할 것이 없으니까.

누굴 만나서, 인터넷으로 찾아서 어디가 좋대 - 어디가 힙하대 하는 정보를 접하는 것도 어찌 보면 좋겠지만, 나는 이런 식의 경험이 참 마음에 든다. 그것은 일상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특정 지역에 대해 '안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자유롭게 길을 고르고 그곳을 거닐다 보면 분명히 느껴지는 것이 있다. 일이나 직장상사에 메이지 않은 자유, 내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오롯이 나의 결정만으로 이 시간을 채우는 것.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짐'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꾸리기 전에는 여행을 할 수 없나 보다. 그래서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비행기표를 사놓고 나서야 마음을 놓고 준비한다. 금요일에 등록한 체육관 신입 회원이 '깔끔하게 월요일부터'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뭘 하기 전에 꼭 준비해야 하는 걸까? 아니, 준비를 할 수나 있는 걸까?

경복궁 역을 향한 건널목에서 무심코 이 문구를 봤다. 여행은 느릴수록 좋은 것 같다. 비행기로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자동차 - 킥보드 - 자전거 - 두 다리로 옮아올수록 우리 여행은 조금씩 진득하고 꾸덕꾸덕해진다. 그 반죽을 발효시키는 건 아무래도 길 위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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