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외할머니
주말에 밭에서 감자를 캐면서 엄마는 연신
할머니가 감자를 얼마나 잘 드시는지
또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그 말씀만 하셨다
이제 할머니가 이 좋은걸 못 드시니 아쉽다고만 말씀하셨다
같이 감자를 캐주시던 엄마 친구이신 순자아주머니는
호상..이라고 하셨다
사실만큼 사시고 돌아가셨으니 아쉬울 게 없다고 말씀하셨다
호상..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호상.... 호.. 상..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부천 한 장례식장으로 애들 줄줄이 끌고 갔는데
할머니 병간호 하느라 살이 쪽 빠진.. 삼촌두분이 계셨다.
큰삼촌은 할머니께서 편찮으신 뒤엔 회사도 그만두고
식사를 잘 못하시는 할머니 매일 세 시간씩 밥을 먹이며 간호를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50대에 찍은 젊은 영정사진을 보고 있었는데
우리 아기들은 영정사진 아래에 피워놓은 향을 보고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 위에 촛불을 끄는 것처럼 후후 불어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철 모르는 애기들 모습에 여기저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 모두.. 호상이라고 했다.
할머니 입관식
마음 여린 남편은 아이들 7명을 돌보기로 했다
가족모두 입관식을 보게 됐는데
할머니의 몸이 닦일 때마다 팔하나 올려질 때마다 다리하나 보일 때마다
모두들 할머니의 야윈 모습에 울기시작했다
영혼이 없는 몸은 저렇게 작아지는구나.
할머니의 골격이 보일 때마다 나는 할머니가 긴팔을 가진..
긴 다리를 가진 아주 선이 고운 여자가 보였다.
몸이 닦이고, 수의로 갈아입혀진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 할머니께 인사를 하는데, 가족 모두 할머니 얼굴을 비비며 눈물을 흘릴 때
나는 웃음이 날뻔했던 것..
할머니 눈썹문신
예전에 할머니 집에 잠깐 살게 됐을 때 할머니가 퍼러둥둥한 눈썹문신을 하고 오셨길래
할머니 그거 안 지워진다!!
어쩔 거야!!
했더니
선영아. 할머니 죽으면 이것만 가지고 갈 거다.
나는 할머니의 찬 얼굴을 만지고.. 헙수룩한 신발을 만지면서
그동안 찾지 않았던 하나님을 찾고 기도를 드렸다
모든 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 할머니를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실 분은 하나님뿐이시니
부디.. 할머니를 좋은 곳으로 편히 모셔가주세요
오랜 병치례에 상한 몸 말고 , 예쁜 첫사랑 만났을 때의 고운 모습으로
모셔가 달라고.. 내내 기도를 했다.
할머니는 세 번 시집을 가셨다
엄마는 그게 그렇게 창피했다고 늘 말씀하셨다
오빠는 홍 씨 나는 길 씨 삼촌은 박 씨..
그래서 상주이름 아래에 주르륵 쓰인 자식이름들 중 엄마이름은 길 씨가 아닌 박 씨로 적혀있었다.
엄마는 처음으로 마지막 제사를 앞두고 말씀하셨다
누가 남자에 환장을 해서 그렇게 시집을 갔겠니
할머니는 두 번째 시집가시기 전에.. 순자아주머니의 어머님께
그 사람이 눈도 찌그러지고 키가 땅딸만 하고 다릴절어도
논도 있고 밭도 있고 소도 두 마리라서 우리 애들이 굶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지금이야 여자들이 일할 때가 쌔고 쌨지만 그땐 정말 일할 때가 없어서
그렇게 재가를 해서 애들을 거 둬 먹이는 일이 흔하다고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늘.. 첫사랑이었던 홍 씨 할아버지를 그리셨다고 했는데
홍 씨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나이가 같으셨다고 했다
그 시절 고등학교를 나와서 좋은 직장에 다니셨다고 했다 그래서 어디 출장이라도 다녀오실 때면
늘 할머니께 드릴, 분을 사 오거나 아니면 작은 선물이라도 사 오시고
어딜 나가면 꼭 할머니 손을 잡고 다니실정도로 정이 깊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늘.. 꿈에 본 정만으로도 살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었다
전쟁 중, 폭격이 시작되고 집에 메어있는 소를 풀어주러 가시며 , ' 숙자는 어서 가서 숨어있어 소만 풀어주고 바로 따라갈 테니까 ' 소를 풀어주러 가셨던 할아버지는 집안에 떨어진 폭격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 시기 삼일 전에 할머니는
고운 흰색 한복을 입고 엄마꿈에 나오셨다고 했다
엄마는 그 꿈에 할머니가 입으셨던 한복을 수의 안쪽에 입혀달라고 부탁을 했었고
할머니는 그 옷을 입고 이쁘게 가실 수 있었다
할머니를 모시던 날은
내내 비가 오던 봄날 중에 개였던 단 하루였다
그날은 봄비 대신 거리에 꽃비가 내렸다
유독 꽃을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셔가셨던 것 같아
나는.. 고맙고.. 또 고마웠다.
할머니를 위해 기도드리는 내 내
나는 선이 고운 예쁜 아가씨와 첫사랑을 만난 모습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꽃길을 두 손 꼭 잡고 걸어가는 두 분을 생각했다
이제 부천.. 상동을 갈 일이 없어졌다
가끔씩이라도 김치라도 하고 감자라도 캐면 택배대신 할머니께 드리러 갔었는데
이젠 갈 일이 없다
중동시장에서 줄줄이 돌아다니면서 주전부리할 일도 이젠 없다
그런데.. 그래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아직 믿기지가 않는다
깊은 밤.. 그간 말하지 못했던. 내 깊은 슬픔에 대해. 얘기를 주절주절...
건하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이게 끝이라고 말했다
건하야 이게 끝이야?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제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고 빤한 눈으로 보길래 이야기를 시작했다
건하야.. 이 동그라미는 끝인데
이건 세상의 끝이야
거기엔 다른 세상으로 가는 다른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면.. 지금 여길 떠난 사람들이 살고 있데
뽀로로..
응.. 거기 뽀로로도 살고...
라바도 살고
할머니도 살고.. 할아버지도 살고..
.. 다시 세상의 끝.. 나의 깊은 슬픔, 나의 사랑 할머니 얘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