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번째 연애가 시작되었다. 내가 그 친구와 사귀게 될 것이란 걸 내 주변 친구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몇몇 친구들은 "왜?", "진짜?"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긴 나도 그 친구와 연인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들의 반응이 그렇게 놀랍지 않았고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했다. 내 친구들이 이렇게 반응할 수 있었던 건, 그 상대를 3년 동안 같이 봐왔던 친구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고교 동창이었다. 그렇다고 그 친구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길;; 너무 아웃사이더인 성향인지라 모두가 의문을 표했던 것이니..
내가 그 친구를 사귀게 되었던 건, 고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지나서인 24살 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야 하던 시점. 당시 아이러브스쿨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동창 찾기가 한창 유행이었는데, 고교 모임방을 만들었으니 가입하라는 친구의 연락으로 당시 연락하던 친구들이 우르르 가입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졸업 이후에 연락처의 변경 등으로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던 친구들까지 이 동창모임 사이트를 통해 다시금 연락이 닿게 되었다. 현재는 사라진 이 아이러브스쿨은 친구들을 찾고 추억을 되살린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학창 시절 고백하지 못했던 '첫사랑'에 대한 뒤늦은 사랑 고백과 이로 인한 잘못된 만남이 이뤄지는 부작용이 발생되면서 불륜의 장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한창 유행하던 그때, 고교시절로 돌아가는 추억의 공간인 그 사이트에서 나를 찾던 그 친구의 연락으로 4-5년 만에 다시 연락이 닿게 되었고 그 인연이 첫 번째 연애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 친구를 선택해서 모태솔로를 탈출하였을까???!!!
그 친구가 내게 고백을 하던 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고교 시절에도 뜬금없는 편지나 연락으로 마음을 전달받았지만 잠시 지나가는 감정이겠거니 하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까지도 몇 차례 연락과 만남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구의 말로는 마음을 표현했음에도 내가 적당한 선을 그으며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더라. 당시의 나는 심리적 & 경제적 여유도, 연인관계로의 발전도 부담스러웠을 때였고, 친구로 지내는 것이 더 좋다는 판단 하에 관계는 더 발전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친구 역시 여러 차례의 거절을 받으며 연락을 끊어버렸던 것.(이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일방적인 단절을..;;;)
4년여의 시간이 흘러 다시금 만남을 이어가던 초반까지도 반가운 마음은 있었지만 연인관계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흘러서도 나에 대한 마음이 동일하다는 그 친구의 고백에, '어쩌면 이 친구라면 애정이 변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났고 그것이 연애의 시작이 되었다. 오랫동안 알던 사람이었던지라,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일차적으로 경계심을 낮춰주었다. 그리고 워낙에 민감한 친구였던 지라, 내 소소한 말이나 행동변화에도 내가 원하던 것들을 만족시키고자 했었고 그러한 애정과 배려가 애정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경감시켜주었다.
모든 시작이 그러하듯 처음은 아름다웠고 그렇게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 여가 지나갈 즈음부터,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 CDD20, 출처 Pixabay
그 친구의 마음은 모르니 오로지 내 입장에서만 돌이켜보자면, 문제는 이러했다.
관계 형성에 있어서 심리적 거리감을 조절하지 못한 채 '네가 사랑한다면 나를 잘 살피고 알아주고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걸 계속 보여줘.'라는 비합리적이고 자기본위적인 억지가 하나. 애정관계에서는 모든 곳을 개방하고 공유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불편감과 고통을 쏟아냈던 게 둘. 그리고 그 사람의 존재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보다는 현재의 내 부족한 부분과 비교하면서 내 열등감과 질투를 투영시켜 관계에 금을 만들어갔던 것이 셋. 넷 그리고 다섯... 그 이상의 이유들도 열거하자면 나오겠지만, 나를 오랫동안 좋아했던 만큼 나를 무조건적으로 다 받아주지 않을까에 대한 어린 아이 같은 마술적 사고가 미성숙한 관계를 만들어냈고 결과적으로 갈등을 유발했던 것이리라..
이런 갈등이 생기면서 헤어지자는 말이 오가고 다시 만나기를 3-4차례 반복하면서 2년여의 연애가 지속되던 즈음, 아주 사소한 갈등을 끝으로 그는 갑작스럽게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 사소한 갈등이란 게 그 친구의 아버님께 건강보조식품을 선물하려던 것에서 파생되었던 것이니, 당시는 이게 관계를 단절시킬 정도의 갈등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이건 그냥 핑계일 뿐 그 친구가 이별을 준비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진짜 사람의 인연의 시작과 끝은 예측이 불가한 것임을 인식시켜준 갈등... 그리고 갈등이 생길 때면 이미 몇 차례 동일한 방식으로 연락두절 모드를 취하던 그의 대응방식에 이제는 나도 지쳐있던 터라, 이번엔 나도 헤어지자는 전화 메시지를 남기며 만남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렇게 첫 번째 연애는 끝이 났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으니, 이별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건 이성적으로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헤어짐이 이렇게 예의 없게 이뤄질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가타부타 얘기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형식적이나마 잘 지내라 해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일방적 잠수, 연락두절이라니...
그렇게 예의 없는 이별로 끝나버린 이 관계는 내게는 한 마디 설명도 없이 집을 나가버린 부친과의 헤어짐을 소환시켰다. 내가 사랑했던 존재들은 참 예의가 없구나. 본인들의 욕구에 따라서 관계를 유지하기도 끊어내기도 하는구나. 그래 천륜이라는 부모-자식 관계도 본인의 욕망을 따라 끊어내고 가버리는데, 부부도 아니고 기껏 2년 연애한 사이가 뭐 그리 대수라고 예의까지 갖추며 이별할 소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 스스로를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냥 연애 장애를 가지며 살아갈 것을, 과거의 내가 가진 부질없는 기대가 지금의 나에게 이런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에 과거의 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가끔은 굳이 이해하지 않는 게 좋을 때가 있다. 이해가 필요하지 않은 때도 있다. 상대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쓸수록 내 언행과 의사결정을 반추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자기 평가와 때로는 비판이 활성화되면서 나를 향해 화살을 쏘고 상처를 입히니까. 나는 그때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이유를 찾아내며 그 행동을 이해해 보고자 하였고 그 원인을 내 행동에서 찾아내 보려 하였다. 진짜 내 부모의 고향이 그 집안에서 그리도 싫어하는 지역이어서 그런 것인가? (세상에 지역감정이 그토록 강할 수 있는가? 내가 그 지역에서 성장한 것도 아닌 것을;;) 내가 너무 귀찮게 했나? (그래 내가 귀찮게 하고 감정 기복이 있었지.. 논문을 쓰고 수련병원 지원을 하는 동안 불안정해서 징징대기는 했지만 이 정도도 못 버텨주나?)
에이,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싫어져서 그런 것이겠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데 이유가 없듯이 싫어하고 떠나는 것에도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하고 정리하니, 사랑한다는 그 모든 것은 역시 허망하고 부질없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그래 이 실체도 없는 부질없는 감정에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놀아났던 거구나.. 쯧쯧쯧.. 역시 믿지 말았어야지, 내 안의 불신 대마왕이 잃었던 왕좌를 되찾으며 다시금 속삭였다.
씁쓸하게 나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연애는 무쓸모라는 생각을 남긴 연애는 그렇게 흘러갔고
사랑에 대한 불신이 더 공고해졌다.
그렇게 상처받은 내가 절뚝거리면서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