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회복을 기원합니다.
임상심리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24개월 전후 아이부터 80대를 훌쩍 넘긴 어르신까지 연령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대부분의 경우 24개월 전후의 유아들은 영유아검진에서 동일 개월수(연령)의 아이들보다 언어, 인지 발달이 느리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이 불안정하거나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추가적인 정밀검사를 받도록 권고받아 내원한다. 50대 후반 이후의 장년층과 노년층의 어르신들은 기억력 저하, 이에 따른 기분 저하 등을 주호소로 내원하시며, 연령의 증가에 따라 감퇴되는 인지적 & 기능적 능력의 수준을 측정하는 신경인지기능 검사가 시행된다. 그리고 이들을 제외한 폭넓은 중간 지점에 자리한 연령층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져있는 지능검사와 투사검사, 설문검사 등을 포함한 종합심리검사가 주로 시행된다.
종합심리검사는 그들이 호소하는 심리적 어려움과 정신증적인(psychotic)한 상태, 현실검증력(reality testing)의 정도, 증상의 심각도(severity), 성격적 특성과 대인관계 역동, 적응곤란의 원인 등을 평가한다. 더불어 정신과적 어려움의 정도와 이로 인한 군복무의 가능 여부를 평가하기 위한 병무용 검사가 시행되고, 직장내 괴롭힘과 같은 스트레스 사건으로 인한 장애의 유무를 판단하기 위한 법적 자료의 요구에 따라 검사가 이뤄지기도 한다. 기억력이나 전두엽기능 등의 신경학적인 능력의 수행 정도를 측정하는 신경심리검사도 시행되는데, 대부분 이런 경우는 외상성 뇌손상으로 인한 신경학적인 손상의 정도와 치료적 접근에 따른 회복의 정도를 파악해내고 평가하고자 할 때 이뤄진다. 외상성 뇌손상이 주로 발생되는 대표적인 상황은 교통사고와 낙상, 추락, 낙하하는 물체에의 충돌 사고, 물질 중독 등이 있으며, 이러한 경우 환자들의 현 기능의 손상 정도를 파악하여 치료계획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법적 소송 및 보상을 위한 자료 제출의 목적으로 신경심리검사가 시행된다. 그리고 이날 자료로 만난 환자는 교통사고로 외상성 뇌손상을 입은 아이였다.
수련감독자로 근무하는 내가 환자를 만나는 방식은 대부분 실무자인 수련 임상심리사 선생님들이 수행한 심리검사의 원자료와 면담자료, 그리고 수련 임상심리사 선생님들이 작성한 1차 심리평가보고서, 그리고 진료 시에 주치의가 작성한 차트라는 중간 매개체를 통해서이다. 대학병원의 심리실은 수련감독자인 임상심리사와 수련과정에 있는 수련 임상심리사로 구성되는데, 일의 구조 상 수련 임상심리사들이 실무자로 환자와의 대면 심리검사를 수행한다. 수련감독자는 수련 임상심리사들의 검사진행 및 평가보고서 작성을 지도 & 관리감독하며 최종 심리평가의 전문성과 진단적 정확성을 날카롭게 다듬는 역할을 수행하기에, 실무자가 수행한 검사자료와 차트를 통해 환자를 만나고 환자의 어려움과 문제, 진단을 내리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날 환자는 재활의학과에 입원한 아이로, 10세된 여아였다. 현재 아이의 기능수준을 파악하여 이에 적합한 치료계획을 세우기 위해 정신건강의학과로 협진이 의뢰된 상태였고, 우리과 전문간호사 선생님을 통해 아이의 상태는 일부 들었던 터였다. 사고는 벌써 수개월 전인 작년 가을에 발생하였던 상태였고, 우리 병원으로 전원한 것은 올 봄. 봄날에 차트로 만난 아이의 손상 정도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보행 중 교통사고로 인해 심한 두부 손상(head injury)을 입은 아이는, 특히 전두엽과 두정엽 부위에 큰 손상을 입은 상태였다. 아이는 사고 직후 입원치료를 받던 병원에서 수상 후 몇일 간 지속되는 간질 발작이 통제되지 않아 타기관으로 이송되어 2개월 가량 입원치료를 받다가 연고지에 따라 본원으로 전원해 입원치료를 받게 된 상황이었다. 다행히 간질 발작은 조절되고 있으나 사고 직후부터 전원 전까지 발화가 거의 이뤄지지 못하다가 이제야 간단한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상태였고, 인지장애, 보행장애 등등 대부분 기능들의 손상이 심각하였다.
아이의 평가는 2년차 수련 임상심리사 선생님이 담당하였다. 전원오기 전의 타병원 기록들과 우리 병원의 입원 경과기록과 간호기록, 영상의학과 검사 결과 등을 살펴보면서 아이가 3~4시간에 걸친 종합심리검사의 수행을 견딜 수 있을 컨디션이 아니라는 것은 차트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하였기에, 여러 차례 검사를 나눠서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아이의 검사는 실시되었다. 간단하지만 언어적 의사소통은 가능하였고 힘든 치료를 받는 와중임에도 밝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안쓰러웠다고 했다.
완료된 아이의 검사 자료들과 보호자 면담자료, 작성된 1차 심리평가보고서를 받아들고 보호자 면담 자료부터 읽어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수상 전 아이의 발달과정, 학교생활 등등에 대한 보호자 면담 자료를 읽을수록 현재 아이의 손상이 더 또렷하게 들어왔다. 주변 친구들을 늘 챙겨주던 아이였다고 한다. 똑똑하고 똑부러지는 아이였고 친화력뿐 아니라 수행 능력도 좋았던 아이. 친구들이 보고 싶어 지금도 학교를 가고 싶다는 아이는 종종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지만, 정작 연결된 전화 통화에서는 친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친구의 이름만 부르다가 끊는다고 한다. 이걸 바라보는 보호자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질까.. 나도 같이 마음이 아파진다. 더욱이 영상의학 검사 자료에서 나타나는 손상 부위를 재확인할수록 회복 가능성이 낮겠구나 하는 예측들이 하나씩 늘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계속 울컥 울컥 해져서 손상이 명확한 그 자료들을 마주하기 힘들어졌다. 눈가에 고인 눈물 때문에 자료가 흐려져서 읽기를 그만 멈춰야했다.
여느 때와 똑같이 일어나 등교를 준비하고 항상 다니던 등교길을 걸어갔을 텐데, 왜 하필이면 그날 그 시각에 불과 몇 분의 차이로 아이가 이 사고를 겪게 되었을까. 겨우 도보 3-5분 거리의 길 하나만 건너는 학교를 가던 그 아침 길. 그 짧은 시간에 아이는 회복이 어려울 정도의 손상을 입었다. 누가 감히 생각했을까, 이런 사고를...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떡하니..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창밖을 바라보면서 깊게 숨을 몰아 쉬었다. 조금이나마 울컥하는 마음을 달래고는 다시 아이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대기실에서 잠깐 마주하였던 아이의 예쁜 얼굴이 떠오르고 차트와 검사자료에서 객관적으로 손상을 알려주는 데이터들을 확인하면서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회복될 가능성이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수상 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 자료들.. 혼자서 일상적인 생활을 할 정도로의 회복이라도 되면 좋을텐데.. 그마저도 쉽지 않아 보이는 자료들에, 경과기록에, 마음의 아림이 더 느껴졌다. 더 꼼꼼하게 자료를 살피고 심리평가보고서를 읽어가며 아이의 현 상태를 기술하는 문장들과 치료적 제언을 다듬고 진단을 적어나간다. 지금 아이에게 임상가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이의 상태를 주치의가 명확하게 인식하고 치료계획을 세울 수 있는 밑자료를 전달해주는 것이니까. 아이에 대한 마음을 더해 보고서를 검토해나갔다.
사람들의 어느 한 시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경험하는 때에 증상과 그 사연을 마주하는 일을 하는 직업이기에, 환자들의 사연과 증상, 고통 등에 무뎌지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환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탄식과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더욱이 아이들이 아픈 걸 마주하는 건 여전히 참 힘들다. 아이의 아픔과 향후 성장에서 마주할 어려움이 예측되기에 힘든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아이의 손상 뿐 아니라 보호자의 고통과 어려움까지도 느껴지기에 그 고통을 마주하는 자리가 더 힘들어진다. 특히나 아이들의 엄마가 된 이후, 환자인 아이뿐 아니라 보호자의 고통에도 시선이 가고 고통의 전이가 더 깊어진다. 옛말에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겪게 한다는 말을, 극도의 손상 앞에서는 수용하기가 참 어렵다. 도대체 뭐가 견딜 만큼의 시련이란 걸까. 왜 이 아이에게 이런 고통을 겪게 할까, 항변하고 싶어진다.
오랜만에 아이의 차트를 열어봤다. 아이는 다행히 우리가 만난 그날로부터 2달간 더 입원치료를 유지하다가 현재는 외래 통원치료를 받는 상태였다. 입원했던 시점보다는 언어적 의사소통이 더 늘어났지만 여전히 손상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도 지속적인 재활치료를 받으며 이전 평가 시보다 조금이라도 회복된 모습이 기록된 차트에 반가운 마음이 든다. 하루 하루 조금씩 더 회복되기를. 그래서 아이도 보호자도 고통이 조금이나마 옅어지기를 바라본다.. 다시금 만날 때에는 더 회복된 모습이기를,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