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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May 16. 2021

더러운 길고양이 젖소의 구애_사랑하니 닦아줄게

경계/공격, 기다림/들이댐/뻔뻔함/당당한 요구, 그리고 질투

길고양이 젖소를 처음 봤을 때 수풀 속에 숨어 경계하는 모습이 조심스러웠지만 예뻐서 눈이 갔다.

TV에서 보면 비슷한 고양이가 많은데, 젖소는 무늬가 대칭이고 근육이 발달해 건강하고 잘생겼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눈동자가 연노란색인데 좀 노려보는 것 같은 무서운 눈빛이지만 신비해서 자꾸 쳐다보게 되기도 했다.


내가 길고양이 치타를 챙겨주는 걸 알고 어느새 다가와 쳐다보고 있으니 무시할 수가 없다. 처음엔 가까이 다가가면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먹이를 줘도 발로 낚아채려고만 했다. 처음에는 치타를 공격하니 '차라리 친구를 만들어줘야겠다.' 생각해, 한 번 두 번 챙겨주다 보니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같이 챙겨주게 되었다. 사료를 큰 포대로 사면 한 마리 먹일 거 두 마리 못 먹일까 보냐 생각해서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이사 가면 이 두 마리를 어떻게 데리고 가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로 정이 들었다. 정원 딸린 집으로 이사 갈까?,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갈까?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치타에게 먹이를 주고 인근 운동장에 산책을 가면 치타가 졸졸 따라왔었는데, 이제는 젖소도 경쟁을 하듯 따라온다. 치타가 싫어하는 것 같지만 힘에 밀리니, 치타도 나도 어쩔 수 없이 젖소의 들이댐을 받아들여야 되는 입장이 되었다.

누가 누구를 길들이는지 모르겠다.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에게 집사라는 호칭이 괜히 붙는 게 아님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분명 치타만 예뻐하고 챙겨주려 한 것이었는데, 젖소와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지?!

이런 상황이 전개될 걸 분명히 우려했었는데, 시나브로 벌써 6개월쯤 되어나가 보다.

처음엔 사람을 경계하고 주변 고양이들과 영역을 두고 싸우더니, 슬금슬금 다가와서 치타가 먹이를 먹는 동안 차 밑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치타가 먹을 것을 남기면 차지하려고 기다리는 것으로 생각되어, 치타를 공격하지 않게 아예 좀 떨어진 장소에 먹이를 챙겨주다가 지금은 매일 같은 장소에서 챙겨주게 되었다.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주차장에 숨어 있다가 짠 나타나기도 하고, 차를 가지고 가지 않는 날도 있는데 요일 개념이 없는 젖소는 아예 치타 영역에 숨어 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젖소도 치타가 사람과 친해서 먹이를 먹고 사냥 놀이를 즐기는 생활이 좋아 보이고 부러웠던 것 같다. 자신도 함께하고 싶은데 친하지 않으니 자꾸 따라다니면서 지켜보았던 것 같다. 젖소를 보면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제는 산책하는데 따라와  '벌러덩' 드러누워 애교를 부린다.

어느덧 친해져서 다리에 몸을 비비기도 하고, 엉덩이를 들이대기도 한다. 검은 털이라 하얀 비듬이나 흙먼지가 잘 보여서 피해 다녔는데, 워낙 적극적인 아이라 불시에 접촉이 있을 때가 많아졌다. 그러다가 젖소에게 벼룩이 옮았다. (오! 마이 갓!!!) 어느 날 지나가다 젖소의 아지트를 본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흙 구덩에 나뭇가지로 덮인 야생의 장소였다. 비가 오는 날은 아마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장소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지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 뒤로는 먹이를 먹을 때 프랑스 산 허브 약품을 발라주고 국산 기생충 약도 먹이고, EM 용액을 희석해서 멀리서 물줄기를 분사했다. 고양이가 물을 싫어하니 치타를 공격할 때 주로 사용했다. 지금은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매일 휴지에 적셔 닦아주고 있다. 심지어 밥 먹을 때 털도 빗겨준다. 밥만 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정이 통하니 관리해야 될 게 더 늘었다.


유튜브를 보면 길고양이 입양을 많이 하는데, 벼룩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좀 당황스러웠다. 처음부터 목욕이 가능하진 않을 텐데 말이다. 미용 샵이나 병원에 데려가면 목욕과 발톱 정리가 해결되는지 궁금하다.


길고양이에게 입양은 삶의 구원이자 휴거가 아닐까?

그렇지만 길고양이 입양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도 경제적, 건강상, 생활 패턴, 가족의 동의 등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더러움과 해충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죄가 있으면 사랑해도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메시아를 보냈구나.

내가 야생성을 가진 젖소를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없었던 것처럼 처음에는 여러 가지 상황과 여건을 통해 깨닫게 하고 정말 가까워지면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단계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라는 걸.


죄라고 하면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나님과 생각이 다른 상태라고 하면 좀 이해가 쉬울까? 생각이 다르면 서로 통하지가 않는다. 인간 사이에도 서로 내 생각이 맞다고 우기면 관계는 평행선을 이루며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전하는 자, 메시아를 보냈나 보다.


언어의 힘은 참으로 크다. 생각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육신을 움직이게 한다. 그중에서도 실제 행함으로 실체를 이루고 하는 말은 그 영향력이 큼을 우리는 성공자들을 통해 본다.


그러니 '창조자,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실천한 그 힘은 세상의 어떤 목표나 성과를 이룬 것보다 얼마나 더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변화다.

인생의 살아있는 기간뿐만 아니라 영원한 삶, 즉 영생까지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말씀은 인생을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즉 하나님께로 데려다준다. 그 말씀을 실천하다 보면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말이다.


우리가 태어나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듯이,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깨닫고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참 뜻을 알기 위한 필수적인 일임을 나를 통해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통해 깨닫는다.


인생들이 구약의 율법에 갇혀 ‘하나님께서  말씀을 직접 하시려고 보낸 예수님 제대로 모르고 미워하고 핍박하며 죽이려는  죄를, 예수님이  떠안고 사랑으로 희생하며,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도록 십자가의 길을 가신 메시아의 실체의 삶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임을 이제는 어느 정도는 아는 시대가 되었다.


길고양이에게 누군가 벼룩을 잡아 주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듯이,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죄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도 인류 구원의 문제를 놓고 천군을 불러 반대하는 자들을 쓸어 버릴 수 있는 능력과 선택의 권한이 있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인간사’이기에 무력으로 행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희생했음을 알아드렸으면 좋겠다.


예수님만 다 떠안게 하지 말고 이제는 그 말씀을 들음으로 스스로 깨끗하게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고양이처럼 집사에게만 의존하는 삶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 본다.


그러나 이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시대와 문명이 발달함으로 그로 인한 혜택과 함께 더 많은 생각의 싸움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인생의 가르침을 아주 세세하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스승을 원하기에 다양한 매체를 접하고 찾지만, 공허함을 벗어날 수는 없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메사아를 모르고서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본격적으로 외치시며 활동하신 기간이 3년 반 정도 되었다.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각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인생 동안 스스로 실천하도록 가르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었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다 가르치셨다. 제자들은 어리지(자신이 따르는 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잘 몰랐다.), 유대인들은 증오하고 멸시하며 반대하다 못해 죽이려고까지 하니 급박한 상황 속에서 쫓기면서 말씀을 전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애간장이 타셨을까?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늘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듯 새로운 답이 필요하고, 그래서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들 한다. 하물며 하나님에 대해서랴.......


우리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뿅' 사라지게 하는 마법사 같은 메시아가 아니고, 얼굴에 주름과 흰머리가 하루하루 늘어나는데도 거울도 안 보는지, '내 육신은 영원히 산다'며 나를 따르라는 사기꾼 같은 메시아도 아니고, 인생을 보다 의미 있게 기쁘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생의 참 목적을 알려주고, 영원성을 가진 영혼까지도 책임질 수 있는 스승 같은 메시아가 필요하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p.s 그래서 다시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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