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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se Nov 10. 2022

여자 친구

떨림의 농도


분명히 티가 났을 거란 걸 안다. 나의 감정은 목소리뿐 아니라, 글자에서도 종종 드러나고, 다행인지 나의 글자가 갖고 있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마저도 잘 캐치하는 그 이니까. 게다가 눈치가 영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드러내버리고 말았지만, 이번엔.


태풍 힌남노라는 이름도 낯선 어마 무시한 놈이 북상 중이라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이미 바지 밑단이 흠뻑 젖을 만큼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런 날씨에 그가 '여자 사람 친구'의 집에 음식을 가져다주고 왔다. 그녀는 나와도 아주 친한 사이인데, 굳이 가리자면 해외에 나가 있던 시간이 길어 간간히 보던 나보단, 쭉 만남을 지속해오던 그와 좀 더 가깝다고 해야 하려나. 그날은 그 ‘가깝다’는 사실이 조금은 함정처럼 느껴지는 날이었다.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려면 할 수 있었다.

고질병이 갑자기 심해져 병원에 실려 갔다 왔고, 약 한 달간은 일도 쉬고 요양을 하기로 했다고 했다. 지인들이 함께 있는 채팅창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접하고 바로 통화를 잠깐 했고, 도울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나에게 괜찮다던 그녀가 왜 하필이면 무시무시하게 태풍이 휘몰아치는 날에, 나도 아끼느라 무리한 부탁은 결코 하지 않는 나의 남자에게, 배달이 안된다는 이유로 음식을 사다 달라한 걸까. 내가 갖게 된 마음속의 물음과 불쾌함과 의구심들이 낮은 폭포처럼 차분하게 식은 채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아픈, 소중한 친구를 위해 충분히 해줄  있는 일이라는 그의 생각,  입장에서 모르면 안 된다 생각해 말해주었다는 판단. 명확하고 깔끔하다. 어떤 의도도 의미도 없다. 그리고 나는 사실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도 안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니까. 그저 이전에 없던  '여자 친구인' 나의 존재에 대해 미처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었을 뿐이라고, 이제는 생각할  있다. 당시 당장은 어쩔  없이, 무리해 보이는 부탁을 그렇게나 스스럼없이   있을 정도였나  둘은, 일종의 질투 같은 감정이 저변에 깔려 있었더래도.


골이 난다. 따져 묻고, 저지할 이유를 찾을  없어서다. 옹졸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합리화할  없어서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런 면을 시샘하고  사랑한다. 그러니 결국 닮고 싶은 그의 결정을 따르고, 그는 내가 수긍할 만한 제스처로 보답해주일단락이 되었다.


 일이 있은  얼마 ,  사용하지 않아 어플도 지워놓았던  sns 어쩌다 로그인을 하게 된 김에, 사진을  훑어보며 정리를 했다. 그리고 20 가까이 되는  모든 사진들과  모든 시간들 아래에 그녀의 멘트가 달려 있었다. 멀리 타지에 있는 나를 염려하고, 괜찮을 거라 위로하고, 잘하고 있다 응원해주던 그녀가 보였다.

그날, 그가 나를 잡아 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의 이해가 닿아야  곳은 그와 그녀와의 우정뿐 아니라, 나와 그녀, 우리의 것이기도 했다는 것을, 어쩌면 그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금방 가라앉고  파도였으니, 무리해서 바다로 나가지않으면 되었던 거다. 그저 잠시만, 숨을 가다듬고 기다리면 잠잠하고 아름답게 출렁이는 바다를 만날  있는 거라고,  시간을 가질  있도록 그날, 까만 밤의 등대처럼 그가 나를 인도해주었다. 안전하고, 단단한 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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