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3분소설
“한 대리님 말이야. 오키나와로 한달살기 가신다며?”
그게 그렇게 별일인가 싶을 정도로 회사에 소문이 났다. 하지만 점심시간에 동기 앞에서 그녀의 한달살기 계획을 자세히 술술 읊고 있는 나를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녀를 가슴 깊이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한 대리님은 내 첫 사수였다. 나는 그녀 옆자리에서 일을 배우면서 1년 후에나 있을 한달살기 계획을 짜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일단 요즘은 가정체험학습인지 하는 게 있어서 아들도 결석 처리 없이 함께 다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첫 번째 숙소를 이시가키 항구 근처로 정했다는 것도, 갈 때는 3일간 후쿠오카에 머물고 경유해서 갈 예정이고 2주씩 각각 다른 지역에서 묵을 예정인 것도 알게 됐다.
같이 일하는 동안 나는 선배의 여행 고민에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임했다. 숙소를 같이 봐 주었고 항공편 가격 비교도 같이 했다. 2월이면 맹렬한 겨울일 이곳과는 달리 그곳의 날씨는 온화한 봄일 터였다.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봄바람이 상상됐다.
“세미 씨는 안 가?”
그녀의 물음에 나는 에이,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대리님처럼 같이 갈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휴직할 일도 없구요.”
사실 그대로였다. 자녀도 없고 몸이 아프지도 않아 휴직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입사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아 1인분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이런 주제에 어딘가에서 한달살기를 꿈꾸는 것은 마치 사치처럼 느껴졌다.
“휴직 안 하면 어때. 며칠이라도 다녀와 봐. 여행이란 게 사람을 버티게 한다니까?”
“저는 파워 집순이라.”
마음이 불편해졌다. 꼭 자기가 놀러가는 게 민망하니 나한테도 강요하는 기분이랄까. 괜히 해외여행을 부추기는 것 같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계속 내가 여행 안 가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도 성가셨다.
그녀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나는 왜인지 그후로 그녀를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휴직이 다음주로 다가오면서 나는 이유 모를 상실감에 휩싸였다.
그녀가 슬슬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홀가분하게 남은 일을 인수인계하는 걸 보면서, 나는 꼭 가슴 한켠을 뚝 떼어내는 것 같이 허해졌다.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 이유를 오늘 점심시간에 알게 된 것이다.
“한 대리님 말이야. 오키나와로 한달살기 가신다며?”
동기까지 그렇게 묻자 난 그만 신물이 났다.
“요즘 사람들이 나만 보면 다 그 얘기더라.”
“언제 가신대?”
“다음주에. 휴직하고 바로.”
“가족 다 같이?”
“응. 가정체험학습인지 뭔지가 있어서 결석으로 안 되고 갔다올 수 있나봐. 남편분은 이미 휴직 중이셨고 한달 겹쳐서 교대 예정.”
“와, 좋겠다. 오키나와 날씨 어떠려나?”
“봄날씨래. 18도에서 21도 정도.”
“근데 오키나와는 섬 아니야? 관광할 게 많나?”
“관광 목적이 아니라 그냥 힐링 목적이래. 신혼 때 오키나와 가셨었는데 너무 좋아서 나중에 아이 생기면 꼭 한달살기 하기로 하셨었대. 가서 아무것도 안할 거래.”
“와, 너무 좋다! 너무 좋다!”
동기가 물개박수까지 치며 즐거워했다.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남 여행 가는 게 그렇게 주위에서 호들갑 떨 일인지 모르겠어. 사람들이 청첩장 받으면 꼭 신혼여행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는 것도 그래. 어딜 간다고 하든 ‘와 좋겠다’ 하고 말 거면서.”
“대리만족 하는 거지. 이 각박한 세상에 그것도 못하니?”
“진짜 의미없다. 대리만족 같은 걸 뭐하러 해.”
“야. 그래도 위치 에너지라는 게 있잖아.”
“위치 에너지 그럴 때 쓰는 말 아니야. 위치 에너지는 높이를 말하는 거지 해외가 아니라고.”
내가 정확한 말로 핀잔을 줬다. 가끔 문과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야. 뭐면 어때? 이 서울에서 물 건너 떠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힘이 샘솟지 않니? 그런 얘기 듣고 기운도 받고, 뭐 그러는 거지.”
뒷머리를 치는 것 같은 작은 충격이 스쳤다. 기운을 받는다라.
문득 내가 요즘 너무 지쳐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여행 얘기에 여우가 신 포도 보듯 기분이 뾰족해질 정도로. 힘들게 입사한 회사에 완벽히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1년간 모든 힘을 너무 쏟아부었다. 이 서울에.
‘여행이란 게 사람을 버티게 한다니까?’
그녀의 한달살기를 같이 알아봐주며 나는 아무래도 기운을 받았던 것 같았다.
‘휴직 안 하면 어때. 며칠이라도 다녀와 봐.’
사무실 들어가면 나도 비행기 티켓을 한번 찾아봐야겠다, 생각했다. 이 서울 땅에서는 더는 기운 나올 데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