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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리 Oct 15. 2023

바다은행 (1)

직장인 3분소설

1


“먼저 TOEFL을 준비했어. 입사하기 전에 외국계 금융권을 노리느라 TOEIC과 TOEFL을 병행했던 게 큰 도움이 됐지. 하지만 크게 어려운 건 아니야. 요구하는 점수만 넘기면 자격 충족이 되는 식이라. CPA는 1차만 해도 충분히 알아줘. 내가 그 직무에 열정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수단으로 활용했어.”


혜나는 이제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싶을 정도로 자신의 해외 파견 합격 노하우를 무용담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목소리도 그닥 들어본 적 없었던 혜나는 의외로 말주변이 꽤 있었다. 뭐, 저렇게 말할 수 있을 날만을 기다리며 절치부심했을지도 모르지.


1년만의 동기모임이 성사된 건 그나마도 혜나의 송별회 덕이었다. 입사한지 3년, 활발하던 동기모임은 점점 그 명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존재감 없던 혜나가 며칠 전 회사 공지에 등장하면서 제1번 존재감으로 급부상했고, 동기모임에 별로 참석하지 않던 동기들도 약간의 동경과 호기심을 가지고 여기에 모였다.


“해외지사 자료는 어디서 구했어?”

“면접은 뭐 물어봐?”

“그럼 출국은 언제야?”


동기들은 이것저것 끊임없이 질문했다. 차마 노트를 펴서 적기는 자존심 상하는지, 저마다 눈동자를 굴리며 혜나의 대답을 머리에 담았다. 동기들의 질문은 신중했고 조심스러웠고, 혜나는 당당했다.


나는 혜나가 우리 쪽을 계속 신경쓰고 있다고 느꼈다. 나와 윤지는 일부러 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하든 우리가 자기를 부러워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무엇보다 우린 해외 파견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우리는 온몸으로 관심 없다는 티를 내며 연신 소주잔만 기울였다.


나와 윤지라고 사실 다를 것은 없었다. 우리 동기 중에서도 해외 파견을, 그것도 뉴욕으로 가는 사람이 나왔다는 건 동기 모두를 은근히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다른 동기들처럼 아무 관심도 없다가 갑자기 혜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뻔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다음날 점심을 일찍 먹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회사 게시판에 들어갔다. 해외지사 파견에 대한 공고문을 찾아 클릭했다.


이 글을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사실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이 글을 찾아 읽었다. 아니, 사실 처음 공고가 올라왔을 때 봤었다. 실제 뉴욕 지사는 뉴욕에 있지도 않댔는데 나는 자유의 여신상이 그려진 배경에 매료됐다. 하지만 막상 내가 여기에 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회사에서 날고 기는 사람들이 도전할 텐데. 상상만 해보는 걸로 족했었다.


그런데 그걸 혜나가. 지방대를 나온 김혜나가.


정신없이 한참 스크롤을 내리다 고개를 들었다. 같은 부서의 경찬의 컴퓨터에도 자유의 여신상이 띄워져 있다. 언제 들어왔는지 조용했다. 몰두해있던 그가 고개를 들자 나는 황급히 못 본 척했다. 내 자리가 뒤쪽이길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그 글에 관심을 가졌었다는 걸 오픈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궁금했다. 어제 동기모임에 온 30명 중 나와 경찬처럼 다시 찾아 읽어본 사람이 있을까. 어제의 조회수는 알 길이 없었으므로 난 메모지 귀퉁이에 지금의 조회수를 작게 적어 놓았다. 8월 30일, 1738.


작게 쓴 숫자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윤지는 어떨까. 윤지야말로 이런 데에 전혀 관심 가질 애가 아니었다. 윤지는 회사는 돈 버는 곳일 뿐 회사에 영혼을 뺏기지 않고 취미로 그리던 웹툰을 계속 그리고 싶다고 했다. 윤지는 오늘도 업무 서류 밑에 백지 한 장을 깔아두고 대박날 스토리를 구상하고 있을 터였다.


윤지에게 사내 메신저를 보냈다.


[뭐 해? 오늘 치맥 어때?]


경찬이 보는 걸 봤다는 말을 얼른 해주고 싶었다.


[오늘은 엄마 생일이라 안 돼…….]

[그럼 주말에는? 야, 생각해보니까 이번 여름에 물놀이 한 번도 못 갔어.]

[그래. 가자.]


수도권 외곽으로 조금 나가면 윤지와 자주 가던 인피니티풀 수영장이 있었다. 끝에서 사진을 찍으면 바다와 감쪽같이 이어지는 인생샷이 나오는 명소였다. 여름 피크가 다 간 교외의 관광지는 벌써 사람이 뜸했다. 윤지와 나는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킥판을 띄웠다. 잔잔한 물결 위에서 여유를 즐겼다.


“혜나 걔, 진짜 앙큼하지 않니? 어제 그 공고문 봤는데, 지원 가능 자격이 딱 3년 이상이더라. 어떻게 그렇게 딱 맞춰서 준비를 했는지.”


내 질문에 윤지는 말없이 물 위로 누웠다. 우린 입사 이래 3년간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했다. 퇴근하면 저녁에 꼭 반주를 했고 서로의 남자친구를 소개시켰다.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밤새 술을 마셨다. 여름엔 수영장을, 겨울엔 스키장을 갔다.


세상이 주황빛으로 저물어갔다. 아까부터 수평선에 으스러지는 해가 미련을 부리며 정체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만큼 뒷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 이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 우리가 놀러와서 제일 센치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입사 초기에는 외국계 준비했었다는 말 입도 뻥긋 안 했으면서 왜 갑자기 자랑스럽게 술술 말해? 안 붙었으면 평생 안 말했을 거면서 말이야.”

“…….”

“걔 실적 모자라서 자기 돈으로 채운 적도 있다며. 지독하다, 지독해.”


윤지는 계속 말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피곤하게 살아야 되나 싶어. 크게 달라질 것도 없는 삶 욕심부리면서 아등바등 사는 건 난 별로.”

“응.”


윤지의 반응이 줄곧 미지근했다. 이번엔 나도 조금 짜증이 나서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다. 미동이 없던 윤지가 등을 돌려 몸을 움직였다.


“걔가 대단한 거지. 남의 노력을 비웃는 건 옳지 않아.”


윤지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녀는 내쪽이 아니라 석양만 응시했다. 노을빛에 비친 윤지는 어딘가 외딴 곳에 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뜨뜻해진 물과 다르게 내 등은 서늘해졌다.


윤지가 달라졌다.



2


찬물로 머리를 감자 이성은 더 분명해졌다. 집에 돌아오는 동안 나와 윤지는 대화하지 않았다. 침묵을 못 견디는 사람들이 침묵하는 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다. 빨리 해외 파견 공고문을 확인하고 싶어 모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날처럼 속이 거멓게 탔다.


집에 돌아와 지체없이 행동에 착수했다. 그 행동이란 건 침대에 꼿꼿하게 앉아 윤지와의 메신저 대화방을 쭉쭉 쓸어올리는 거였다.


대부분은 시덥잖은 이야기들이었다. 대부분은 점심 메뉴에 대한 얘기였다. 이것에선 별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음식 취향만큼은 정확히 같았으니까. 매번 떡볶이, 아니면 매운 국물. 어떤 것을 먹더라도 그 중에 매운 것.


나는 대화창을 올려보는 것만으로 우리의 사이를 정확하게 증명 가능하다는 것에 내심 놀랐다.


언젠가는 승진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난 승진하려고 끊임없이 아등바등하며 살고 싶지가 않아. 여기 들어오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또 경쟁을 하라고? 난 못 해. 회사는 그냥 돈 버는 곳으로만. 난 항상 사직서를 품고 다닐 거야.


하지만 미묘한 무게의 차이가 있었다. 난 윤지와 나의 가치관이 맞는다고 생각해왔다. 오히려 윤지가 더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분명히 내가 그런 말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윤지는 어느 정도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언젠가부터 윤지가 먼저 그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닌데. 분명히 내가 기억하는 대화가 있었는데.

진짜 철없었을 때의, 말하기도 민망한 그 대화가 분명 어디 있을 텐데.


나는 더 격렬하게 대화창을 역행했다. 2022년, 2021년, 한 해가 축약되어 빠르게 지나갔다. 아주 긴밀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손가락 하나로 슥슥 들춰올리자니 그다지 덧없음에 가슴 한 켠이 착잡하게 식었다.


찾았다. 입사한지 채 1년이 안 됐을 때였다.


[어떻게 혜나가 수석이지? 스펙이나 대학 이름값 빼고 들어갈 게 뭐가 있다고?]

[내 말이. 그리고 사회성도 좀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어차피 마스크 쓰고 일하는데 사회성이야 뭐.ㅋㅋㅋ 메타버스 있잖아.]


지금 보기엔 너무 낯뜨거운 질투성 대화였다. 하지만 25세의 우리는 분명히 같은 지점에서 심사가 꼬여 있었고 대화가 정확히 통했다. 지금처럼 무슨 말인지 뻔히 알면서 모른 체하는 겉도는 사이는 아니었다. 


가슴속에서 큰 돌이 쿵 떨어졌다. 정확하게 짚을 수 없는 어딘가가 푹 파인 것처럼 공허했다.


집요하고 구질구질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집요하게 스마트폰을 위아래로 휘저었다.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쪽에서 먼저 변심했나 하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우정을 지탱하던 철없는 마음을 누가 먼저 저버렸나 하는 거였다. 우린 철이 없어도 같이 없었고, 드는 것도 같이 들었다.


나는 낮과 밤을 가르는 노을처럼 윤지와 나 사이의 탈선을 분명히 느꼈고 그걸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정확한 데이터를 얻어버렸다.


윤지는 작년부터 화요일과 목요일엔 나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있었다. 윤지가 나를 저버린 것도 정확히 그때부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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