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 수원삼성과 경주한수원의 FA컵 8강 경기를 시청했다. 너무나도 똑같은 상황에 작년 FA컵 8강을 봤던 것이 생각났다. 그 때도 올해처럼 승부차기까지 가서 '꾸역승'을 했다.
(※FA컵 : 프로와 아마추어를 통틀어 우리나라의 최강 축구팀을 가리는 대회)
이 글은,
내가 잊을 수 없는 작년 FA컵 8강 경기에 대한 얘기다.
그 날은 아직도 기억하는데, 퇴근하면서 스마트폰 중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걸었다. 승부차기 하나 찰 때마다 멈춰서서 긴장하고, 심장을 쓸어내리고, 또 걷다가 멈춰서서 후들후들 떨고 그랬더란다.
승부차기는 정말 잔인한 제도다. 어떻게든 승패를 구분짓겠다는 것 아닌가. 전반전 45분, 후반전 45분에서 승부가 나지 않으면 연장전을 한다. 연장전은 전반 15분, 후반 15분이다. 이 연장전에서 후반 10분 수원이 골을 넣었다. 드디어 승부가 났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연장 후반 추가시간'에 또 동점골을 먹힌 게 아닌가! 와, 120분을 쉼없이 뛰었는데도 승부가 안 났으면 그건 운명이거늘, 기어이 승부차기로 결딴을 낸다.
2시간의 수고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 순서대로 공 차는 걸로 승부를 갈라버리다니. 그 많은 시간 최선을 다하고도 한 순간 승부차기에서 실축한다면? 벼랑 끝 악몽이 따로없다.(직장인인 나에겐 '팀의 패배를 누구 한 사람에게 책임 지우는' 무시무시한 제도라는 생각이...)
따지고 보명 정말 지독한 제도이다. 하지만 토너먼트는 자비가 없다. 무조건 한 쪽은 이기고 한 쪽은 져야만 한다.
출처: 네이버TV 캡쳐승부차기도 정말 피를 말렸다. 그 때 우리 수원의 골키퍼는 신화용이었는데, 신화용이 상대 팀의 첫 골을 막아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승부차기는 첫 선방이 나왔을 때 제일 분위기가 고조된다. 별 기대가 없다가 갑자기 기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우리 수원이 넣었다. 경기장 분위기도 달아오르고 내 텐션도 달아오른다. 앞으로 양팀의 모든 골이 다 들어간다면 우리가 이긴다!
나는 버스정류장을 50m 남겨놓고 도무지 앞으로 걸어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한 발짝 걷고 멈춰서 긴장, 한 발짝 걷고 멈춰서 긴장했으니까. 보도 변으로 늘어서있는 치킨집과 식당 안에서는 내가 웃겨보였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심각했다. 심장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고 나는 '제발 넣어라. 제발 막아라.' 하는 생각뿐이었다.
승부차기는 ABBA 순서로 진행됐다. 원래는 A-B-A-B, 즉 양팀이 한 번씩 번갈아가며 차는 거였는데 나중에 차는 팀이 불리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A-B-B-A-A-B-B 이런 식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이게 뭐냐고? 선축 팀이 한 번 차고, 그 다음부터는 양팀이 두 번씩 차는 거다.
ABAB가 공평해 보이는데 왜 바꾼 건지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내용은 이렇다. A팀이 먼저 넣었을 경우 B팀은 쫓아가는 기분이 들어 심리적으로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읽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여간 승부차기는 최대한 공평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조런 사정까지 고려해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 이 ABBA 방식이 오히려 후축 팀인 우리에게 더 조마조마함을 주었다. 1골을 막고 1골을 넣은 그 순간의 고조된 기대와는 달리, 그 다음 번에는 수원이 실축을 했기 때문이다.
'하, 기껏 막았는데 우리가 못 넣을 줄이야.'
그러면 그 다음 상대 팀이 찰 때는 심장이 더 쿵쾅쿵쾅 뛰는 거다.
'제발 막아라. 제발 막아라.'
그런데 웬 일! 우리가 또 막아낸 게 아닌가! 분위기는 후다닥 다시 올라왔다. 다시 우리가 1점 앞서는 상태가 되었다. 그 다음은 상대 팀이 두 번 찰 차례였다. 그런데 또 웬 일! '갓화용'이 둘 다 막아낸 것이다! 분위기가 최고조로 올라간 상태에서 수원은 또 한 번 실축했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난리도 아니었다. 결국은 마지막까지 가서야 승리를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들고 '씨익' 웃으며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그날 밤의 상쾌한 공기까지 기억한다. 밤거리를 얼마나 신나게 걸었는지 모른다. 나는 축구가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재미있어 죽겠다! 순간 순간 초긴장했다가 풀리는(결국 우리 팀이 이겨야 한다) 그 경험이 아주 신나고 즐거운 것이다. 심장이 하도 뛰어 얼얼할 지경이었지만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엄청 매운 불닭볶음면을 먹고 싶다. 누구는 달달한 게 먹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완전 혀가 부러질 것처럼 매운 게 먹고 싶다. 그게 오히려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 축구도 나한테 그런 것 같다. 왕 떨렸다가 왕 신났다가. 끝나고 나면 심장을 한바탕 마사지 받은 것 같이 시원하다.
하지만 축잘알 분들의 생각은 또 달랐다. 그나마 작년엔 같은 K리그에 있는 제주와의 경기였으니 망정이지, 이번 경기는 프로팀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경기력 차이가 없냐고.
이날 우리가 상대한 팀은 세미프로 격인 내셔널리그의 '경주한국수력원자력(경주한수원)'이었다. 축구를 전업으로 하는 프로축구가 아닌 실업축구 리그인데, 수준이 결코 낮지 않다고 한다. 쟁쟁한 팀도 쟁쟁한 선수도 많다.
수원 팬들은 아무리 그래도 프로팀과 '비'프로팀의 경기력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테니 아무래도 수원삼성이 훨씬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럴 줄 알긴 했다. 축알못이 더하면 더했지. 당연히 프로팀이 훨씬 잘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완전 훨씬 잘하지 않으니' 실망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프로팀과 비프로팀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프로팀이 당연히 훨씬 잘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 않을까?
유명한 공무원 시험 강사는 그랬다. "나는 급수를 떠나서 공채라는 것을 통해 합격한 모든 사람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난 그 말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어쨌든 각자가 자신의 '링'에서 제일 잘 하는 수준까지 올라온 사람들이니까. 프로는 프로라는 '자기 링'에서 인정받아 프로가 된 것이고, 비프로는 비프로대로 자기 수준의 링에서는 최고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링 자체의 수준 차이는 있겠지만, 단순하게 비교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출처: 프로축구연맹이러니 저러니 해도 답답한 경기력이기는 했다. 안타까운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노동건의 선방쇼와 승부차기를 지켜보는 긴장감, 그리고 승리의 즐거움을 결국은 선물해 준 경기였다. 축구는 그 '결국은'도 중요하다.
그 '결국은'을 가져온 수원삼성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