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병수볼

축알못의 축구보기(7)

by 도리

K리그에 강원FC라고 있다.


너무 제3자처럼 말한다고? 사실 나는 강원FC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이 정도의 거리가 정확하다.


사실 강원FC는 진짜로 눈에 많이 안 띄는 클럽이다. 원도가 워낙 넓은 지역 아닌가. 게다가 원주나 춘천 정도 빼고는 다 시골이다.(아니라면 도시를 제게 알려주세요...) 그 넓은 지역을 커버하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홈구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썼다고 한다.

2017년 강원FC가 홈구장으로 쓰던 평창 알펜시아 스타디움

속초, 원주, 강릉 종합운동장에서 하는가 하면, 2017년에는 평창의 스키점프 경기장 밑에 그라운드를 설치해서 거기서 경기를 했다고. 이게 뭐야 싶지만 올림픽이 끝나고 시설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보도 못한 축구장은 맞다. 지금은 그나마 춘천 송암 레포츠타운에 자리를 잡아 모든 홈경기를 한 곳에서 하고 있지만, 홈구장이 계속 바뀌면 관중이 아무래도 떠나게 된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찾아보니 강원FC는 역사도 마음이 쓰리다. 2008년에 창단한 이후 2013년에 강등되어 4년 동안 암흑기를 겪었다나. 2016년에 4년만에 성남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승격했다고 한다. (그 성남이 올해 승격한 것이군요.) 강등된 4년 동안은 관중수도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데다 언제 또 승격할지 모르니 실로 암담했을 것이다.





그런 강원이 일을 냈다!

6월 23일, 그 역사적인 경기가 있었다. 사실 이 글은, 저번 주에 강원이 우리 수원에게 비슷한 악몽을 떠올리게 해 줘서 '식겁해서' 쓰는 글이다.


6월 23일, 강원의 홈구장에서 포항과의 경기가 있었다. 포항은 최순호 감독이 경질된 후로도 계속 부진을 겪었다. 특히 그 때는 근 한 달을 무승을 거두고 있어 분위기가 정말, 아주 안 좋았다. 강원은 그나마 좀 나았다. 거기도 못 이기고 있긴 매한가지였지만 최소한 무승부는 쭉 가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축구를 좋아하게 되기 전에는 '축구는 흐름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수많은 의사결정점이 90분 동안 부딪히는 축구경기의 특성상 절대적인 실력뿐 아니라 심리적 요인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출처: 한국프로축구연맹

경기는 포항에게 아주 좋게 흘러갔다. 골이 아주 '적정한 시간마다' 딱딱 맞춰 들어가줘서 강원의 의지를 구간 구간 꺾었다. 한 번 보시라. 18분->38분->54분->56분. 전반전 두 골, 후반전 두 골이 칸칸이 잘도 들어갔다. 게다가 세 골은 완델손이 해트트릭을 한 것이었다. 누가 봐도 포항이 그간의 부진한 흐름을 끊고 대승을 거두며 반등할 것만 같은 경기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도대체 누가 반전을 생각하겠는가. 한 골이라도 넣으려면 진작 넣었겠지!


지금 와서 결과론적으로 얘기해보자면, 포항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마지막 골이 들어간 후에도 경기가 36분이 남게 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누가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고, 36분은 거의 한 하프에 맞먹는 시간이 아닌가. 축구경기가 3쿼터로 진행되는 날도 있나? 어떻게 4골을 넣었는데 36분이 남아서, 그 36분동안 5골을 먹혀서 진단 말인가.

출처: 한국프로축구연맹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보시라. 56분에 마지막 골을 먹힌 후 강원은 71분->78분->91분->93분->95분에 총 다섯 골을 넣었다! 78분에 2:4를 만들어 내면서 김병수 감독이 일어나서 나오며 다시 전술 지시에 돌입하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으로 나오는데, 너무 멋있어! 그게 영화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 장면은 하이라이트로 봐도 소름이 돋을 것이다.)


골 하나 하나를 봐도 전율이 돋는다. 70분에 조재완의 갑작스러운 슈팅에 포항 골키퍼는 몸을 뻗어보지도 못하고 정지한 상태로 골을 허망하게 먹힌다. 78분의 골은 또 어떤가, 골키퍼가 선방해서 튕겨 냈는데 또 슈팅을 했는데 그게 골대를 맞고 튕겨 나왔거든? 근데 또 차서 넣었다!(재잘재잘) 여기서 김병수 감독이 다시 비장하게 나오며 손을 뻗어 선수들에게 지시를 기 시작한다.

"신에게는 아직 10분이 남아있소이다." (출처: SPOTV 중계 캡쳐)

91분의 골은 추가시간에도 뭔가가 더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를 줬고, 93분에는 '추가시간 +4분'이라는 글자가 무색하게 조재완이 자신의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4:4를 만들어낸다. 경기장 분위기는 난리도 아니었다. 동점도 놀라운데 95분에는 정조국이 우뚝 솟아올라 헤더로 한 골을 더 추가했다.

"나는 될 놈이구나!^^!" (출처: MBC 라디오스타 캡쳐)

이 날은 U-20 월드컵에서 '빛광연'으로 활약하고 돌아온 이광연 골키퍼의 데뷔전이기도 했다. 어린 선수에게 팀이 4:0이 되는 시간은 정말 악몽과도 같았을 것이다. (멘탈이 탈탈 털렸을 것 같은데?) 실제로 라디오스타에 나와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형들이 후반에 한 골씩 넣기 시작하면서 '아, 난 될놈이구나.' 했다는 능청스러운 말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두 달 후, 그러니까 저번 주말이었다.

돌풍의 강원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도 간절했다. 간당간당한 상위스플릿에 안착해야 했고, 7월 전경기 골을 폭발시키던 타가트가 두어 경기 묶였으며, 바로 전 주에는 10년동안 홈 패가 없던 인천에게까지 진 상황이었다.


우리의 타가트가 13분과 56분에 두 골이나 넣었다. 2:0이 되는 순간 심장이 우당탕탕 뛰며 '드디어 이긴다.'라는 기대감이 치솟았다. 그런데 불과 3분 후 강원의 골이 들어간 게 아닌가. 심장이 또 1초만에 콩알만하게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포항 경기때처럼 우리도 56분이었다. 또 '병수볼'의 희생양이 우리가 되면 어떡하지.


실제로 저번 주에 인천의 '빅버드 징크스 극복'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 우리로선 강원을 상대하면서 도저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이번 경기에서 94분에 골을 넣는 주인공은 우리 타가트가 되었다. 휴, 강원에게도 속타는 경기였겠지만 우리에게도 무서운 경기였다.

출처: 한국프로축구연맹

병수볼이 진짜 무서운 건 강원 선수들이 95분에도 골이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감은 경험에서 나온다. 앞으로 강원 선수들은 95분에 지고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4:0을 4:5로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 팀은 누구도 만만하게 볼 수 없다. 그 경험과 자신감은 상대팀에게도 공포를 줄 수 있다.


강원FC는 이제 어떤 경기에서든 심리전에서 우위를 차지할 것이다. 사실 그게 진짜 병수볼이 노리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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