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님? 안녕하세요? 여기 지원해 주신 000 회사입니다"
갑작스러운 전화. 기계적인 지원을 반복할 때라 회사 이름을 듣고도 지원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렇게 대단한 분이 어떻게 우리 회사를 지원했대 허허허"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다.
"사시는 곳이랑 우리 회사랑 아주 가깝더라고요? 한번 만나서 일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아 참고로 나 대표입니다"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냉큼 좋다고 했다.
"그러면 내일 회사 앞 카페에서 잠시 볼 수 있을까요?"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에? 그것도 회사 사무실도 아니고 카페에서?
뭔가 이상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였기에 나는 평일도 아닌 주말에 사무실도 아닌 카페에서 대표를 만났다.
"정말 저희 회사 지원해 줘서 고맙습니다. 진짜 제가 찾던 분이에요. 우리가 라이브커머스를 어떻게든 좀 살려보려고 하는데 뭐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허허허"
"뭘 하면 되겠습니까?"
"와서 라이브커머스 살리기 위한 무슨 일이든 해보세요"
무슨 일이든 해보세요. 이제 나는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마냥 기다려주는 회사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으니.
"지금 있는 PD 2명이 되게 스트레스 받아해요. 매출 10만 원 나왔다고. 근데 생각해 보세요. 아무것도 안 했으면 그 10만 원도 없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매출 10만 원이 괜찮다고요..? 진심이신가요?"
"네네 저는 오히려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시행착오 겪으면서 배워가는 것이겠지요"
이런 마인드의 대표라면 같이 일하고 싶었다. 아니 사실 선택지도 없었다.
"그럼 연봉은.."
"참 그게 문제인데 허허"
뜸을 들이는 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우리가 워낙 작은 회사다 보니 도저히 연봉을 맞춰드릴 수 없어요. 저희가 최대로 제안드리는 연봉은 예전 받으셨던 연봉 절반 정도예요"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알약 같은 상황이었다. 제안을 수락하면 나는 완벽히 평범한 직장인으로 돌아가겠지만 적어도 생각 없이 생활비 정도는 벌 수 있다. 이 제안을 거절하면 나는 또 처절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미래를 믿으며.
자존감이 바닥 끝까지 추락해 있던 나의 선택은 수락이었다.
"알겠습니다.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이것 참 보물이 들어오네. 제가 참 운이 좋아요 허허허. 그럼 다음 주부터 바로 봅시다"
대표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왠지 점점 마음에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마침내 다시 일자리를 찾았다고 했다. 다시 사회인이 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벌이가 적더라도 우리 집 먹여 살리는 게 급선무지 자존심 따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되뇌었다.
첫 출근 날. 역대 내가 다닌 회사 중 가장 작은 회사다.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내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낡은 오피스텔을 개조한 사무실이었다. 대표부터 직원들 열댓 명이 모두 빈틈없이 붙어 있었고 집에서 쓰는 주방과 화장실이 그대로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사옥이 있는 회사만 다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충격은 계속되었다.
"자 청소합시다"
대표의 한마디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걸레며 빗자루며 찾기 시작했다.
"아 저희는 월요일 아침 업무 전에 이렇게 청소를 해요"
익숙한 듯 인사 담당자가 이야기하며 나에게도 걸레를 건네었다.
나에겐 사무실 청소를 직접 하는 회사도 처음이었다.
대한민국에 이런 회사들이 수도 없이 많겠지만 적어도 처음 겪는 나에게는 적응하기 어렵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나는 서서히 콩나물시루 같은 사무실에도, 한 사람이 온갖 일을 다해야 하는 환경도, 직접 사인하는 종이 결재서류에도, 문이 고장 나 잠기지 않고 민망하다는 이유로 상가 화장실을 써야 하는 상황에도 적응해 갔다.
어느 날 대표가 발표했다.
"우리 이전합시다. 차로 30분 거리에 사무실을 하나 구했어요. 신축 건물이라 훨씬 환경이 좋을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다만 이사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할 겁니다. 업체에게는 아주 일부 크거나 조심해야 하는 물건만 옮기게 할 거예요. 모두 업무 하면서 이사에도 최선을 다해주세요"
이사를 직접 한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대표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사무실의 모든 짐을 직접 싸기 시작했다. 버려야 할 물건들이 버려도 버려도 나왔다. 8월의 땡볕 속에서 짐을 옮기고 물건을 버리는 일을 하니 땀범벅이었다. 사무실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거울 속 나를 보았다.
먼지 뒤집어쓴 머리, 땀에 절은 옷, 늘어진 목장갑.
초라한 모습은 전혀 회사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셀프에 가까운 이사가 끝났다. 몇 날 며칠 몸살에 고생을 했다.
새로운 환경에 왔으니 라이브커머스 관련 재정비에도 박차를 가했다.
상품부터 방송 포맷까지 모조리 바꿨다.
그렇게 시작한 방송은 700만 원에 가까운 매출을 기록했다. 대표가 얘기하던 10만 원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대표는 춤출 듯이 즐거워하며 사무실 전원에게 커피를 샀다. 싱글벙글하며 연신 고생했다는 말을 했다.
회사에 처음으로 블로그 마케팅을 도입했다. 비밀스러운 상품 마냥 대중에 노출되지 않았던 우리의 상품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늘어난 고객에 사무실 전체에 활기가 돌았다.
역시 인재는 자리와 상황을 가리지 않는다고 오랜만에 생각했다. 물론 슈퍼맨의 힘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꾸준히 몇백만 원의 매출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생각하던 차에 대표가 나를 불렀다.
"처음 700만 원 매출이 나오고 계속 떨어지고 있지요?"
"꾸준히 300만 원 400만 원 정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아니 목표를 700만 원 이상으로 잡아야지 왜 떨어진 매출에 만족을 하는 겁니까"
"제가 들어오기 전 매출과 지금 매출을 비교하면 몇 배 차이가 납니다. 당연히 궁극적으로는 훨씬 더 좋아져야겠지만 지금은 그 과정 아니겠습니까. 대표님 처음 저에게 말씀하셨을 때 10만 원 매출도 감사하다고 하셨지요. 모든 눈높이를 최고점에 두면 실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평균 매출을 올려놓고 방송 횟수를 늘려야 합니다"
"내가 언제 10만 원 매출로 만족한다 했어요? 그게 회사예요?"
처음으로 대표는 벌컥 화를 냈다.
본인이 처음에 나에게 한 말이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걸까.
"그리고 앞으로는 두 시간씩 방송을 하면 좋겠습니다"
"네 그건 문제없습니다. 전체 매출도 더 오를 것 같고요"
"근데 쇼호스트 출연료는 두 배 못줍니다. 한 시간 페이로 맞추세요"
"대표님 지금 책정된 출연료 5만 원으로 한 시간 진행 쇼호스트도 정말 어렵게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을 어떻게..."
"회사는 더 돈 못씁니다! 알아서 하세요"
조금의 성공을 맛본 대표는 더더욱 큰 성과를 원했다.
이런 게 꼭 우리 조직만 겪는 일은 아니었다.
대표는 모든 조직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비용은 최소한, 성과는 최대한을 강조했다. 말 바꾸기는 예사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이 개입하고 판단했다. 커뮤니티 등에서 듣기만 하던 마이크로 매니징의 현실이었다. 사람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거의 매일같이 작별인사를 하고 환영인사를 했다. 금방 그만두기도 했지만 대표 말 한마디에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짐을 싸는 사람도 있었다.
더 냉정하고 사람을 몰아붙이는 건 대기업일 수 있다고 오해하지만 오히려 대기업은 눈치를 보면서 최대한 법을 지키려 하고 정부나 관리단체의 주목도가 떨어지는 소기업에서 이런 비극은 자주 일어났다.
어느 날 대표를 제외하고 최고참인 부장이 나를 불렀다.
"오늘 소주 한잔 가능해요?"
"네 좋습니다"
그렇게 조촐하게 시작된 술자리에서 부장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내가 사회경력이 2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월급이 400이 안되네요. 딸은 계속 커가고 돈을 더 들어가는데 답답해요. 자꾸 이런 작은 회사에 있으니까 여러 잡일만 많고 내 발전도 안되고 어디 이직을 하려고 해도 다들 거들떠도 안 봐요"
나는 조용히 부장의 빈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아직 그래도 창창한 나이죠? 여기 어때요? 뭐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좀 짜증 나고는 하지만 6시 되면 가고 일 난이도도 높지 않죠? 커리어 고려하면 식은 죽 먹기 아니에요? 슬슬 편해질 텐데 그렇게 안주하면 영원히 이런 인생이에요"
만취한 부장의 횡설수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술에 취했지만 틀린 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부장말처럼 아직 한창 일하고 벌어야 할 시기에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주말을 이용해 백화점을 갔다. 이벤트 코너에서 아기 옷을 고르던 아내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아기 옷이 만원이나 해. 그냥 당근에서 봐야겠다"
마음이 무너졌다. 만 원짜리 아이 옷 사는 걸 고민하게 만드는데 내가 가장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오빠 반팔티나 보러 가자"
"됐어. 내 새끼 만 원짜리 옷도 못 사주는데 뭔 내 옷을 사"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황급히 마스크를 썼다.
잠시나마 슈퍼맨이라 착각했던 남자의 비참한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