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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Sep 23. 2024

27화 어쩌면 내가 정말 무능한 게 아닐까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어느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력서 보고 연락드려요"


제안이 온 곳은 유명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는 콘텐츠 회사였다.


"제작인원이 50명 정도 되고 총괄 본부장 포지션이 될 거예요"


유명 콘텐츠 회사의 50명 조직의 수장.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 다시 이력서 좀 정리해서 주시고.. 경쟁이 좀 있을 거예요. 지원한 분들이 많아서"


나는 열과 성을 다해 나를 반짝이게 만드는 이력서를 만들었다.


다음날 바로 헤드헌터의 전화가 왔다.


"대표님이 이력은 참 마음에 들어 하시는데.. 나이가 좀 걸린다고 하시네요. 총괄 맡기기에 좀 어리시다고.. 일단 만나보겠다고는 하셨어요"


마흔 살 내외의 나이가 사회에서 참 애매하긴 하다. 실무자로 쓰자니 몸값도 무겁고 머리도 굵고 그렇다고 관리직으로 쓰자니 경험이 좀 부족할 것 같고.


어쨌든 면접 기회가 생긴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다.

집무실에서 만난 대표님은 꽤나 냉정하고 치밀하게 나에게 질문을 했다.

몇 가지 질문 후 마침내 포지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저희가 콘텐츠로는 이제 성장에 한계가 왔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그래서 커머스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신사업 조직인 거죠"

"조직원이 50명 정도 되는 조직의 총괄 포지션으로 전달을 받긴 했습니다만"

" 그 조직과 협업을 긴밀하게 할 텐데 신생 조직으로 따로 만들 계획이에요"


살짝 힘이 빠졌지만 조직원 수가 무슨 대수냐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유명 캐릭터로 상품을 만들고 그걸 캐릭터가 나와서 판매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대표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눈이 반짝였다. 캐릭터를 활용한 판매 방송이라니 너무 재미있겠는걸.


"가능하겠습니까..?"


사업의 가능성이 아닌 내 역량을 물어보는 뉘앙스였다.


"가능합니다. 제가 커리어 내내 해오던 판매 방송에 캐릭터만 들어가는 거네요"

"사실 좀 더 경험 많고 경력도 더 긴 지원자분들도 있는데 일단 그런 쪽 경험이 워낙 많으시니 뵙고 싶긴 했어요. 일단 알겠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을 남기고 그렇게 대표는 면접을 끝냈다.


다음날 헤드헌터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최종 합격 하셨어요! 연봉은 지금 회사 말고 예전에 받으셨던 연봉을 맞춰주신다고 해요"


머리가 멍해졌다. '연봉 상으로는' 한순간에 가장 빛나던 시기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존감이 갑자기 점프를 했다.

그래. 잠시 부침이 있었지만 나는 원래 이런 가치를 가진 사람이었어.

처음으로 회사에 고마웠다.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출근날 대표는 최대한 빠르게 일이 진행되고 결과물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먼저 상품을 파악해 보았다. 회사 내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없었다.

그리고 캐릭터. 캐릭터는 한창 방송에 쓸 수 있게 개발이 되고 있었다.

마지막 판매 채널. 네이버와 유튜브를 동시에 진행해 보기로 했다.

상품을 확보하고 캐릭터가 출연하는 방송을 기획하고 판매 채널을 통해 판매해 보는 것.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의욕에 넘친 것과 달리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알던 MD와 브랜드 대표님들을 통하면 금방 해결될 줄 알았는데 큰 오산이었다.


"캐릭터 PB로 하실 거면 포장부터 다시 만들어야 해요. 포장 디자인은 어떻게 하시게요? 포장 비용은 따로 잡아두신 거죠?"

"재고는 얼마나 하실 거예요? 물류창고는 있죠?"

"최대한 싸게 드리기는 할 텐데 마진 계산은 끝나신 거예요?"


이커머스에 오래 몸 담았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PD와 콘텐츠 쪽 경험이 전부인 나에게 상품 쪽은 거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상품 하나 협의해서 포장만 바꾸고 바로 방송하는 그런 간단한 수준이 아니었다. 몇 통의 통화로 필요한 업무만 포장 디자인부터 공장 섭외, 물류창고 구비, 비용 구조 파악이었다. MD로서 경험이 없던 나는 더듬더듬 일을 진행해 보기 시작했다. 


캐릭터를 이용한 가상  방송 기획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게 실물인 기존 방송과 달리 비용과 시간이 몇 배나 들었다. 현실에서는 쇼호스트가 자유롭게 행동하던 것을 모션 캡처를 통해 캐릭터에게 입혀야 했다. 간단하게 구성하던 방송 무대도 하나하나가 디자인이 필요했고 현실 같으면 그냥 바로 교체하면 되는 소품들도 다시 다 디자인을 하고 랜더링을 해서 만들어야 했다.  하나하나가 돈이었고 간단한 수정이나 추가만 있어도 1~2주 시간 소요는 우스웠다.

본인 브랜딩이 최우선인 쇼호스트들도 본인들 얼굴이 나오지 않는 방송 출연에 반감을 가졌다. 접촉한 거의 모든 쇼호스트가 이런저런 이유로 출연을 거부했다.


판매 채널은 더 큰 문제였다. 그냥 입점이 아니라 판매 방송까지 진행하려면 일정 매출 기준을 충족해야 했다. 본격적인 판매 방송 전에 이미 매출이 발생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것만 해도 한 달 이상 시간이 소요되었다. 유튜브 채널을 활용하자니 결국 유튜브 콘텐츠 제작도 필요했다. 최소 몇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평생 제대로 해보지 않았던 숫자놀음과 처음 접하는 가상현실 방송 거기에 시간을 필요로 하는 판매 채널까지.


면접 시 회사에서 어느 정도 기다려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을 절대 믿으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조직원 중 판매 방송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에 모두 상품 쪽에 집중시키고 나는 방송과 판매 채널 쪽을 어떻게든 빠르게 해결해보고자 했다.


"상품 제안 했던 것들 다 거절당했어요.. 다시 처음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이 캐릭터 모션 하나 추가하면 2주는 걸려요. 그리고 가상 스튜디오 하루 대여에 600만 원 필요합니다."

"유튜브 콘텐츠 기획하고 빠르게 촬영해서 업로드하는데 최소 한 달은 걸립니다"


매일 처절하게 일을 해도 시간이 모자랐고 예산도 모자랐다.


어느 날 대표가 나를 불렀다.


"일 잘 되어가고 있어요? 그래도 첫 방송 날짜가 올해 안이면 좋겠습니다"

"3달 정도 남았는데.. 솔직히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예상 비용을 좀 많이 잡으셨던데.. 저희는 오히려 비용이 절감될 것이라 판단해서 시작한 사업이었어요"

"일반 판매 방송과 달리 모든 게 가상 캐릭터와 가상 스튜디오에서 진행되는 방송인데 비용은 당연히 더 들 수밖에 없습니다"

"출연자 비용이라도 줄여보세요. 캐릭터가 나오는데 쇼호스트를 꼭 이 비용 쓸 필요 있나요?"

"캐릭터가 출연한다 뿐이지 그 행동과 멘트는 결국 누군가 해줘야 합니다. 캐릭터가 알아서 멘트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요.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나와야 하는 쇼호스트들이 모션캡처 장비부터 온갖 장비를 차고 하루 종일 리허설 하고 방송을 하는 프로젝트인데 비용이 더 들면 들었지 줄일 수 있겠습니까" 

"제가 생각했던 방향이랑 좀 많이 다르긴 하네요"


그렇게 대표와의 찝찝한 미팅을 끝내고 왔더니 조직원 하나가 나를 불렀다.


"퇴사하겠습니다. 솔직히 이게 실현될 가능성이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최악의 하루였다. 프로젝트의 방향성에 대해 대표와 합의를 이루지도 못했고 손 하나 아쉬운 마당에 조직원 하나가 회사를 떠났다. 회사는 그 공백을 메워주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일을 못하겠어요. 아무 지원 없이 이렇게 일을 할 수는 없어요"


남은 조직원 중 하나가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게든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싶었고 이 프로젝트가 대중들 앞에 선보여진다면 무조건 큰 반향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한두 달 이어도 좋으니 일 같이 해줄 후보자 있으면 알려주세요. 방법은 제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요"


조직원은 예전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후배가 단기직으로 일해줄 수 있다고 했다.

재택근무 형태로 근무하게 해 준다면 최저임금 수준도 괜찮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분명히 충원을 거부했다. 나에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투입시켜 주세요"


자신 있게 답하고 나는 그 인원의 비용을 개인적으로 부담했다.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내가 라이브커머스에 새 영역을 개척할 수 있다면, 회사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깟 돈 몇 푼은 아깝지 않았다.


일단 급한 불을 껐다고 판단했지만 넘어야 할 산은 계속 나타났다.


판매 채널 확보를 위해 사전 판매를 기획했던 상품은 최종 협의 단계에서 무산되었다.

그래픽과 디자인팀은 처음 해보는 일이고 모션캡처를 완벽히 구현하려면 올해 안에는 힘들 것 같다는 피드백을 해왔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조직원이 우리를 떠나갔다.


3일 정도 번아웃이 왔던 것 같다. 오히려 거대한 벽을 마주하니 지레 포기하고 주저앉은 형국이었다.

내가 마음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인사담당 임원이 나를 호출했다.


"요즘 일 어떠신가요?"

"네 좀 느려서 걱정되지만 어떻게든 해봐야죠"

"제가 이런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성공 가능성을 더 이상 희망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임원들이 오전에 회의를 했는데 커머스 사업에 좀 성급하게 뛰어들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모르셨겠지만 조직원 일부가 다른 조직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도 밝혔고요. 퍼포먼스는 물론이고 조직 관리도 실패했다는 판단입니다"

"제가 오후에 대표님과 이야기를 좀 나눠봐도 될까요? 프로젝트 관련 업데이트도 있고.."

"대표님은 오후에 정부 쪽 일정이 있으셔서 회사에 안 계실 예정입니다. 이런 말씀드리기 참 어렵고 죄송하지만 조직 개편 예정이고 담당 조직은 없어질 예정입니다. 서로 더 어긋나기 전에 이쯤에서 각자 갈 길을 가면 어떨까 하는데요"


마음이 쪼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내가 못해서 회사를 떠난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나름 내가 자신 있던 영역에서 회사로부터 퍼포먼스적인 측면은 물론 관리자 측면에서 실패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겁 없이 뭐든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쓰라리고도 완벽한 패배였다.


마지막 출근 날. 내가 해야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빨리 짐을 싸고 나가는 일뿐.

퇴사하는 나를 배웅하거나 아는 척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회사에서 치움 당한 무능력한 직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잠시 불운한 게 아니라 나의 한계가 여기까지가 아닐까.

지금까지가 오히려 행운인 게 아니었을까.


평생 스스로의 유능함에 확신을 가지고 있던 한 남자의 착각은 이 날 산산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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