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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Sep 26. 2024

28화 하루는 배달하고 하루는 줄 서는 삶


나의 천성인지 근검절약하는 부모님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소비 자체에 큰 욕구가 없었다. 

게다가 빨리 돈을 모으고 투자해서 경제적 자유를 이룬 뒤 이른 은퇴를 하는 것이 항상 꿈이었다.

운 좋게 대기업에 입사하고 이후에도 처우가 좋았던 만큼 수입이 평균 이상은 되었고 소비는 평균 한참 아래다 보니 돈 모이는 속도가 빨랐다.

게다가 일부 투자에서도 성공을 거둬서 그 속도는 한층 가속되었고 계좌에는 늘 현금화 가능한 자산이 두둑하게 있었다.


"아 다음 달에 전세 만기인데 주인집이 2천만 원 올려달라네 허허.. 어디 돈 구할 데 없나"


회사 선배의 넋두리를 들으면서도 계좌에 2천만 원도 없나?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서울에 아파트를 사고 아파트 가격이 끝없이 올라갈 무렵 현재까지 모아둔 돈과 아파트 매도 시 남는 돈을 상상으로나마 합쳐보며 내가 꿈꾸던 은퇴가 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어느 날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파주 쪽 아파트들이 요즘 무섭게 오르고 있는데 갭투자 해볼까?"


2, 3년 안에 억대 수익까지 예상한다던 지인의 말에 나는 그 어떤 조사나 생각도 없이 덜컥 아파트를 매수했다. 심지어 몇 달간 꾸준히 아파트 가격이 오르며 내 장밋빛 미래는 더욱 탄력을 받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부동산 하락장이 찾아왔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서울 아파트는 물론이고 파주의 아파트까지 거짓말 같이 매매가와 전세가가 급락했다.


결국 역전세가 되어버렸고 나는 전세금 반환에만 1억이 훌쩍 넘는 돈을 써야 했다.


어렵게 다음 세입자를 구한 뒤 내게 남은 건 텅 빈 계좌와 급히 빌려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3천만 원의 빚이었다.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주담대는 물론이고.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래 계좌에 100만 원도 없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원치 않는 퇴사를 해서 당장 다음 달 생활도 걱정되었지만 나를 더 절망하게 만든 건 10여 년간 쌓아온 노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이력서를 넣는 것 외에도 당장 돈 될만한 게 필요했다. 원래도 가장이었으나 나의 실수로 가계가 불안정해졌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급하게 배달 대행 어플을 깔았다. 점심시간과 아이가 잠든 밤 시간 이렇게 두 번씩 배달을 시작했다. 

기껏해야 하루에 몇만 원 버는 게 다였지만 그 돈이 이후에 어떻게 요긴하게 쓰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짧은 기간 참 별일이 다 있었다.


대단지 아파트 지하를 헤매다 늦게 배달을 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아니 X발 이렇게 늦게 오면 어쩌겠다는 거야? 야 너 일로 와바"


술에 취한 고객의 폭언에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었다. 이 정도는 예상하고 시작한 일이라 생각했다.


술을 시킨 집으로 배달을 갔다.


"안녕하세요? 술을 시키셔서 신분증 확인이 필요합니다"

"니 눈에는 내가 미성년자로 보여?"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게 규정이어서요"

"짜증 나게 하네. 안 먹어. 가져가"

"네?"

"가져가라고"

"죄송합니다 신분증 잠깐만 보여주시면 되는데.. 아니면 주류만 빼고 수령하셔도 됩니다"

"아 X발 귀찮게 하네. 자 신분증. 됐지?  내가 나이 40 넘어서 신분증 검사나 받고 세상 참 지랄 같네"


당시에는 내 사정도 급했기에 그런 것들이 충격적이진 않다고 생각했다.


눈이 심하게 오던 어느 날. 배달 플랫폼에서 배달비 프로모션을 걸었다. 아내는 말렸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우산 하나에 몸을 숨긴 채 얼어붙는 손을 불어 가며 몇 건의 배달을 완료했다.

몸이 얼어붙어 더 이상 배달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 배달 콜을 잡았다.


파티라도 하는 듯 꽤나 많은 양이었고 나는 우산을 포기하고 양손에 음식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배달을 시작했다. 배달할 아파트가 보이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아주 살짝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나는 미끄러지고 말았다. 


눈썰매를 타듯 한참을 미끄러졌고 내 손을 벗어난 음식들은 여기저기 뿌려지기 시작했다. 눈사람에 부딪혀 겨우 멈춘 나는 상황을 잊고 그냥 누워버렸다. 음식은 모조리 엎어졌고 거리는 물론 옷도 엉망이 되었다.


눈이 펑펑 오는 하늘을 마냥 쳐다봤다. 지금은 내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일련의 일들은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내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얼굴까지 눈이 덮이도록 누워있는 나를 보고 상태를 묻는 행인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양념과 국물로 얼룩진 몸을 일으켜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그날 나는 배달비 몇 배의 돈을 음식 재구매에 썼다.


배달 콜이 적은 시간에도 마냥 놀 수는 없었다. 


새벽부터 줄을 서서 상품을 구매하는 대행 아르바이트에 참여했다. 오전 7시에 모여서 9시까지 줄에 서있다가 오픈런을 하는 일이었다. 두 시간 이상 기약 없이 그저 서있기만 하는 일.  멍하니 서서 출근 시간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오늘도 갈 곳이 있는 그 사람들이 부러웠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유명 회사의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던 남자가 3시간 가까이 길에 서있다가 아직 오픈도 안 한 백화점 뒷문으로 뛰어들어가서 운동화를 샀다. 빠른 몸동작으로 두 켤레나 구매를 했다.

담당자는 고생했다며 3만 원을 손에 쥐어주었다.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돈을 벌었다며 애써 나를 위로했다.


장보기 대행도 자주 했다. 리스트를 넘겨받고 마트에 가서 물품들을 구매 후 집 앞까지 배달했다. 늘 리스트는 길었고 배달을 할 때면 한겨울에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가끔 골라온 감자며 양파며 과일 등이 후지다며 면박을 당하긴 했지만 버틸만했다.


어느 날 특이한 아르바이트가 눈에 띄었다. 헤어 모델 일이었다. 

곧 어엿한 디자이너가 되는 실습생들에게 기꺼이 머리를 내어주는 일이었다.


마침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고 지원한 지 2분 만에 답이 왔다.


"지금 헤어스타일을 알 수 있게 사진을 보내주세요"

"네네 무난한 남자 중간 기장 스타일입니다"


그날 밤 나는 영업을 종료한 한 미용실로 들어갔다.

절반 이상 불을 꺼둔 미용실을 꽤나 어두컴컴했다. 내 현실처럼.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특별히 어떤 스타일을 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생각한 대로 이리저리 좀 커트해 볼 예정이에요. 괜찮으실까요?"

"빡빡 미셔도 됩니다. 편안하게 하세요"


디자이너는 신중하게 커트를 시작했다. 미용실에는 가위 소리와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주로 학생들이 지원하던데 신기했어요. 마침 제가 타깃으로 하는 나이대가에 맞기도 했고 운이 좋았네요. 그래도 회사 가셔야 하니까 다듬는 수준으로만 할게요"


침묵이 싫었는지 디자이너가 살갑게 말을 꺼냈다.


"말씀드렸듯이 편하게 막 자르셔도 돼요. 지금 회사를 안 다녀서"

"아 이직하시나 봐요? 어디 여행은 안 가세요? 딱 이럴 때만 쉴 수 있잖아요. 저는 월요일 딱 하루 쉬고 연중무휴라 연차 있고 공백기에 놀 수 있는 직장인 분들 너무 부러워요"


그냥 둘러대도 문제없었다. 하지막 조금씩 조금씩 조각나고 있던 내 마음과 자존심은 멋대로 입을 놀리게 했다.

"이직하는 건 아니고요"

"아 사업하세요? 사업하시는 분도 정말 존경해요. 저희 점장님도 과감하게 시작.."

"아뇨. 회사원인데 일을 못해서 잘렸습니다"


디자이너의의 가위질이 멈칫했다. 


"아하하 그럼 이제 다시 일 찾아보시는 중이겠네요"


디자이너의 과하게 밝은 목소리. 이렇게 끝내도 괜찮았다. 그런데 내 의지와 다르게 말은 이어졌다.


"오라는 데가 없어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있어요. 아파트 투자를 잘못해서 모아둔 돈도 없어지고.. 가장인데 제 역할을 못하고 있네요. 헤어 모델도 취미 같은 거 전혀 아니고 한 푼이라도 벌 수 있을까 해서 지원한 겁니다"

"네.. 뭐 인생사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죠!"

"음식 배달하다 욕먹고 쏟고 몇 시간씩 멍하게 줄 서있다가 거의 불법에 가깝게 상품 구매 대행도 하고.. 인생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데요. 그 고점은 한없이 낮아지고 저점은 끝없이 떨어지는 느낌이라.."


사각사각 잘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졌다. 한때 슈퍼맨이라 자만하던 한 남자는 이렇게 현실을 깨닫고 오만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있었다. 


다소 당황한 디자이너는 말을 멈추고 커트에 집중했다. 


머리카락과 함께 나의 마지막 자존심도 조각조각 잘려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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