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 가장 가혹한 고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잔인한 고문이 있지만 단연 최악을 꼽자면 신체적 고통을 넘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희망고문이 아닐까?
어려운 상황으로 약해진 마음은 주변은 제안에 쉽게 흔들렸고 침착하게 결과를 예상하기보다는 제발 잘 풀려서 내 상황이 한방에 역전되기만을 바랬다.
"지금 일 쉬고 있다며?"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연락을 해왔다.
"다름이 아니고 혹시 다시 일하기 전까지 같이 사업 해보지 않을래?"
갑작스러운 선배의 제안. 사업이라는 단어가 나를 설레게 했다.
그래 이제 월급쟁이보다 내 사업을 일구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 쇼호스트 아카데미를 하고 있는데 네가 워낙 이런 쪽 지식이 많으니까 강의도 좀 해주고 같이 홍보도 하고 그러면 어떨까 해서"
심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식 전달이라니. 더욱 매력적이었다.
"일단 뭐 이름뿐이지만 이사로 들어와서 교육 담당으로 일하면서 같이 키워보자"
허울뿐인 직함이었지만 바닥난 내 자존감을 일으켜 세우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
선배와 만나 오랫동안 사업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대화가 늘 그렇듯 서로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하고 온갖 그럴듯한 아이디어들이 오갔다. 이것들만 잘 실현되면 나는 더 이상 일자리를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
오랜만에 희망에 찬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강의 커리큘럼을 만들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 손이 춤을 췄고 나름의 홍보 방안까지 만들었다.
이제 쇼호스트를 꿈꾸는 눈이 초롱초롱한 지망생들 앞에서 멋지게 강의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애석하게도 몇 달간 수강생은 한 손에 꼽았다. 이미 수많은 유명 아카데미가 있는 상황에서 신생 아카데미가 바로 잘 돌아가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선배는 나에게 또다시 제안을 했다.
"내가 충북에 아는 시장님이 계시거든? 차라리 거기 지방 셀러들을 육성한다고 그리고 특산물 판매를 하겠다고 제안해보자. 워낙 친분이 있어서 바로 시작하라고 할 거야"
지방 일자리 육성과 특산물 판매라면 시에서도 지원을 해주지 않을까? 또다시 기대가 되었다.
실제 모 시장실에서 직접 시장을 만났다. 선배와 시장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기획서도 넘겼다. 시장은 담당 부서에 이야기해서 사업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시장 책상에 쌓여있는 수많은 제안서들이 신경 쓰였지만 시장실 밖까지 배웅하는 시장의 모습에 자신감이 생겼다.
돌아오는 길에 선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사업을 진행한다면 무엇부터 시작할지, 비용은 어느 정도로 책정할지 등등의 진지한 이야기부터 아예 여기로 이사오자는 우스갯소리까지. 이야기가 쌓일수록 근거 없는 희망도 커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시장실로부터 그리고 시청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오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선배는 사업이 원래 다 이런 거라며 씁쓸해하는 나를 위로했다.
어느 날 평소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하던 국내 유명 이커머스 플랫폼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잘 지내시죠? 업무 하나 논의를 드리고 싶은데요. 혹시 라이브커머스 운영할 조직을 꾸리실 수 있나요?"
"네 가능합니다"
"저희가 이번에 초기 브랜드 육성 관련해서 정부로부터 꽤 큰 지원금을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희와 거래하는 신생 브랜드들에게 라이브커머스 지원을 하려고 하는데 저희가 운영하기가 좀 어려워서요. 방송 하나당 제작비는 300만 원 정도 지원되고 월 방송은 20~30건 예상하고 있어요"
순간 전화기를 떨어뜨릴뻔했다. 제작비 300만 원 방송을 월 20건만 해도 6천만 원이었다. 물론 저게 모두 순이익은 아니지만 몇 년만 운영해도 정말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다 가능합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지금까지 노력의 보상이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지인들을 총 동원해서 스튜디오를 섭외하고 제작진을 꾸렸다. 제작진에게도 이 큰 사업과 미래에 대해 일장연설을 했다. 드디어 다시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준비를 끝내자마자 일주일 간 3건의 방송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 이렇게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시작되었다.
라이브커머스를 처음 접해본 브랜드사들의 피드백도 아주 좋았다. 이제 이렇게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
"담당자님 이번주 방송은 나름 성공적으로 끝낸 것 같네요. 다음 주 리스트 부탁드립니다"
"아.. 그게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처음 내게 의뢰할 때와 달리 담당자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난감해졌다.
한 주간 연락이 없던 담당자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저희 예상과 다르게 브랜드사들이 지원금을 마케팅 쪽으로 활용해 달라는 요청들이 많아서요.. 일단 저희가 브랜드사 요청이 우선인지라.. 일단 라이브커머스 희망 브랜드사도 계속 모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너무 거창하게 말씀드려 죄송해요. 준비 많이 하셨을 텐데"
갑작스러운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면 월 방송 20~30회 진행은 불가능하겠네요?"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다시 연락드릴게요"
담당자의 자신 없는 말투에서 예상되었듯이 그 이후 다시는 방송을 의뢰하는 일은 없었다.
섭외한 스튜디오도 어렵게 구성한 조직도 쓸모가 없어졌다.
내 말만 믿고 모인 제작진에게 할 말이 없었다. 뱉어놓은 말이 컸기에 주워 담는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일장춘몽 같았던 사업 건도 아쉬웠지만 소중한 지인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 나에게는 더욱 슬픈 일이었다.
앞으로 어떤 제안이 오든 큰 기대를 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있던 차에 한 브랜드사에서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브런치스토리를 통해 이커머스 관련 인사이트를 너무 잘 보고 있습니다. 저희 회사가 이커머스를 제대로 시작해보려고 하는데 작가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상장까지 한 규모 있는 회사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니.
웅크렸던 나의 마음이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켰다.
다음날 담당자는 임원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저희가 오프라인에 유명 매장들은 많은데 이게 시즌이나 이슈에 따라 매출이 너무 불규칙해서요. 요즘 또 너무 불경기이기도 하고. 그래서 저희가 매장 메뉴들을 밀키트화 해서 온라인에서 판매하고 마케팅 용도로 라이브커머스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내부에 그런 걸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마침 제가 작가님 브런치스토리를 아주 즐겨보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담당자한테 바로 한번 연락드려보라고 했습니다"
임원이 직접 적극적으로 회사의 상황과 사업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이커머스 진출에 대한 의욕이 대단해 보였다.
"저희 회사 브랜드 한번 살펴보시고 이커머스 진출에 필요한 부분들에 대해 제안서 주시면 저희가 적극 고려해서 업무 요청드리겠습니다. 올해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 회장님도 관심이 많으셔서 예산은 충분히 배정이 될 겁니다"
임원은 자신 있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담당자는 세부 내용을 다시 한번 나와 논의하고 회의를 마치며 싱긋 웃었다.
"저희 임원분이 저렇게 누구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만나자 하시는 분이 아닌데 놀랬어요. 이렇게 뵙게 돼서 너무 영광이고 서로 윈윈 하는 관계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협업하다가 저희 회사 임원으로 와주시면 너무 좋고요"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단어 하나하나가 내 가슴을 치고 갔다.
나는 다음날부터 대표로 내세울 상품 기획, 온라인 몰 오픈, 폐쇄몰 입점, 라이브커머스 및 유튜브 운영까지 다양한 영역에 거쳐 제안서를 만들었다.
담당자는 제안서를 보고 감탄하며 온라인몰 및 폐쇄몰 운영 그리고 라이브커머스와 유튜브 운영을 맡아달라며 세부 기획서와 예산을 요청했다.
그렇게 나는 또 일주일 간 담당자와 씨름하며 최종 기획서와 예산안을 전달했다.
임원의 열정적이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제안 내용의 절반만 진행되어도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은 없어진다.
최종 기획서를 넘긴 시점부터 진행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리고 규모가 계속 축소되었다.
"작가님 죄송한데 윗분들이 이커머스 사업을 처음부터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진행하는 게 맞냐는 의견을 주셔서요. 조금 지체되고 있어요"
"그때 뵈었던 임원분이 요청 주셨던 사항들 위주로 제안드렸는데 분위기가 좀 바뀐 걸까요?"
"그때 같이 뵈었던 저희 임원분이 다음 주에 퇴사를 하셔서.. 조금 상황이 바뀌긴 했는데 사업은 그대로 진행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결국 그 이후 건설적인 대화보다는 매번 예산과 기간에 대한 이야기만 오고 가다 폐쇄몰 입점만 해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처음 말이 오갔던 사업 규모에 비하면 아주 초라한 수준이었다.
이후로도 힘들어진 내 상황만큼 얇아진 귀는 쉽게 팔랑거렸고 헛된 희망과 기대가 차올랐다가 꺼져버리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바람이 가득 찼던 풍선의 바람이 빠지듯 내 마음은 끝없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반복된 희망고문일지라도 슈퍼맨이었다면 혹시 버틸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