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성공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던 때에 비하면 꽤나 신중하고 현실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끝없는 추락에 상처받아 스스로를 더욱 가라앉히던 때에 비하면 꽤나 안정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생활이 될 정도보다 아주 조금 더 벌면서 현재를 유지하고 미래를 아주 조금은 꿈꾸는 그런 삶.
대단할 건 없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지낸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예전 후배 한 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배님 잘 지내세요? 사실 요즘 선배님 브런치 글 쓰시는 거 진짜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그래? 뭐 뻔한 이야기인데 고마워"
"다름이 아니고.. 선배님 소식 여기저기서 들어서 대략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치열하게 살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그래 내가 너무 오만했던 거지 뭐 ㅎ 반성하고 있다"
"그런 뜻이 아니고.. 응원..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 어떤 심정이시고 본인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르겠지만 퇴사하신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선배님 그리워하는 후배들도 많고 선배님처럼 일하고 싶다는 후배들도 있어요"
"응원은 고마운데 과장이 너무 심해서 내가 다 민망하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후배들 자취한다고 밑반찬 만들어서 돌리신 적도 있고 젊은 애들이 나가 놀아야 한다고 크리스마스며 주말 방송도 도맡아 하시고 어려운 출장 같은 것도 일부러 먼저 지원해서 가신 것도 저희 다 기억하고 있어요. 지금 선배님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그때도 지금도 선배님은 정말 괜찮은 분입니다"
괜히 찡해지는 마음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심리학자로서도 존경하고 각종 강연이나 방송 출연 등으로 유명한 교수와 만나 내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교수님. 제가 나름 빠르게 성공을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더 가파른 추락을 했어요. 그냥 아무 선택 없이 그대로 살았어도 달성했을 위치보다 지금 아래에 있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때의 선택들이 후회가 될 때도 있고 무엇보다 지금 뭘 하든지 간에 과거의 높은 위치 생각이 나서 가끔 의욕이 들지 않습니다. 나쁜 영향을 준 사람들이 원망스럽기도 하고요"
교수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꽤 말을 아끼는 투로 대답했다.
"과거의 영광이 있던 사람치고 그것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리워해도 되죠. 그런데 다시 재기하거나 행복한 사람들은 그걸 그리워하는 걸로 딱 멈추거나 오히려 그것을 지금의 원동력으로 삼는데요. 계속 더 실패하거나 발전 없는 사람들은 그때의 영광에 집착을 하는 경우가 많지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임원에서 한순간 실업자가 되고 한동안 나는 후자에 가까웠다. 한껏 높아진 눈으로 과거만 들먹이며 노력 없이도 다시 성공할 줄 알았다.
교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나쁜 영향을 준 사람들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죠. 때로는 험담을 하기도 할 거예요. 험담이 나쁜 건 아니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까지는 통쾌하고 재미있다가 딱 특정선 이상을 넘어가면 기분이 불편하고 속으로 나 자신이 못났다고 은연중으로 느꼈을 때가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 선만 안 넘으면 됩니다"
실제로 나의 몰락에 연관되었던 특정인들에 대한 험담을 무차별적으로 하던 시기가 있었다. 누굴 만나도 그 사람들에 대해 욕하기 바빴다. 물론 교수의 말처럼 어떤 선 이상으로 발언을 했을 때는 오히려 내 추악한 인간성이 드러난 것 같아 후회가 된 적도 있고 지금 내 앞에 앉아 도가 지나친 험담을 듣는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슈퍼맨이라고 착각했던 시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답답해 보이고 때로는 무능해 보이기도 했다. 선택받은 특별한 힘으로 나만 인생의 차별화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를 깨우치듯 인생은 나를 차마 글로 다 전하지 못한 비참했던 경험으로 이끌며 그 단단했던 그 착각을 산산이 부숴주었다.
그 모든 경험을 경험하고 나서야 나는 늦었지만 내가 슈퍼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굳게 믿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진 것은 꽤나 아프지만 대신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해하는 법도 배웠다.
분명 과거가 그립다. 심지어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가능할 리가 없고 나는 이 모든 일들이 내 남은 인생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내 이야기는 절반 밖에 끝나지 않았다.
남은 내 인생은 특별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채워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평범하게 살며 본인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분들을 응원한다.
꽤나 큰 굴곡을 헤치고 나온 후 언젠가 지금까지 나의 커리어에 대해 정리해서 한번 글을 쓰고 싶었다.
다만 그 글이 다른 사람에게도 흥미로울지 확신이 없었기에 차일피일 미루던 중 우연히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를 보게 되었고 이왕 마음먹은 이상 꽉 채운 30화짜리 장기 연재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15화의 성공 이야기 그리고 15화의 실패 이야기를 통해 밸런스를 맞추려고 했으나 나도 사람인지라 성공 이야기가 1화 더 많은 점은 양해를 구하는 점이다.
예상과 너무 다르게 별 것 아닌 나의 인생 이야기를 너무나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고 그 덕분에 책 출간 이후 오랜만에 긴 글을 끝까지 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