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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Sep 13. 2024

24화 IMF의 악몽이 떠올랐다

생존을 위한 내 몸부림은 처절했다.


매일 두 번씩 모든 채용 플랫폼을 드나들며 내 직무에 맞다 싶은 공고에는 모조리 지원을 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슈퍼맨의 힘이라든지 예전의 영광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몇십 개의 지원서를 넣어도 연락이 전무할 때가 많았다. 내가 어떤 회사들에 지원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조금 괜찮은 회사에서 연락이 오면 면접에서 여지없이 탈락했다.

점점 내 선택지는 좁아져갔다.


결국 서류나 면접 진행 중인 회사가 하나도 없고 넣을 채용 공고조차 하나 없는 날이 왔다. 

한마디로 사회에서 거부한 완벽한 백수라는 뜻이었다.


도망치다시피 온 도서관에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한산한 평일 오후 도서관의 풍경조차 나에게는 압박감을 주었다.

한창 일할 시간이 아닌가 지금은.


그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도서관을 뛰쳐나왔다.

정처 없이 걸었다.

문득 1997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우리 집은 당시만 해도 흔하다고 볼 수 없었던 맞벌이었다. 나름 대기업 회사원인 아빠와 안정적인 교사인 엄마의 보살핌 속에 나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어느 날 처음 들어보는 IMF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TV에서도 신문에서도 온통 IMF 이야기뿐이었다. 갓 중학생이었던 나는 이런 세상 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관심이 없었다. 실제 우리 집에 영향을 주기 전까지는.


꽤 높은 자리였던 아빠는 한순간에 정리해고가 되었다. 나는 몰랐지만 해고 통보를 받은 날 밤 아빠는 밤새 슬피 울었다고 한다. 

20년 가까운 직장 생활의 흔적을 담은 정리박스를 가지고 퇴근한 아빠는 의외로 덤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리해고가 무엇인지 아빠가 어떤 처지인지 알지 못했던 나는 평소 못 보던 고급 수첩이며 볼펜 등을 챙기며 좋아했다.

한동안 아빠는 적극적이었다. 나라에서 제공하는 일자리에 나가보기도 하고 열심히 사업 구상도 했다.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했다. 40대 중후반은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였다.


인생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보험회사를 다니다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시작도 못할 사업 구상 서류는 쌓여만 갔다.

술에 취하는 날이 늘어갔다.

아빠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엄마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최소한의 대화 이외에 교류가 없어졌다.

하교 후에도 아빠는 집에 있었다.

학원을 다녀와도 아빠는 집에 있었다.

시험을 치고 친구와 일찍 집에 온 날에도 아빠는 집에 있었다.

아빠가 집에 없는 날은 엄마와 하루종일 마주쳐야 하는 주말뿐이었다.


엄마는 아직 세상을 모르는 중학교 1학년인 나를 앞에 두고 이야기했다.


"우리 집 생활비가 월 230은 되는데... 엄마 월급이 200이 안될때도 많아.."


그때 엄마의 그 안타까운 목소리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그때 신문 배달이라도 할 용기가 있었다면.

그 어려운 시기를 대체 어떻게 지나왔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물정 모르던 나도 서서히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다시 사회에 뛰어들지 않고 집에만 있는 아빠를 답답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 화장실을 가거나 드물게 외출할 때 빠르게 열리고 닫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빠의 방문이 굳게 닫혔다. 그렇게 아빠는 사회로부터 가족으로부터 멀어졌다. 


다시는 그 모든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내 정신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무섭게도 아빠의 모습과 지금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갑작스러운 해고, 취업 전선에서의 계속된 실패, 점점 잃어가는 자신감.


무서워졌다. 


아빠처럼 다시는 직장을 못 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처럼 의욕이 꺼져버린 채 집에 은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처럼 영원히 가족과 금이 간 채로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엄마의 직장이 있었기에 그때의 우리 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집은 내가 유일한 수입원이다.


자꾸 떨쳐내보려고 해도 파편처럼 남아있는 97년의 기억과 그 이후 우리 가족 삶의 결과는 계속 불안함이라는 이름으로 내 마음을 노크했다.


그런 보이지 않는 싸움이 계속될수록 나는 지치고 자신감을 잃어갔다.


끝없이 솟아오르던 슈퍼맨의 삶은 고사하고 일반적인 삶이라도 살 수 있기를 매일매일 기도했다.


그렇게 커리어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나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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