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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Feb 18. 2019

현직 PD의 홈쇼핑 방송 파헤치기

홈쇼핑 방송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홈쇼핑 PD의 입장에서 홈쇼핑 방송 60분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쏟아내는 전쟁터입니다. 실제로 방송이 끝난 직후 다리에 힘이 풀린 적도 있고 목이 다 쉰 적도 있습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며 시청자들을 유혹하는 홈쇼핑 방송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어느 날 갑자기 무알콜 맥주를 론칭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애주가 입장에서 이 무슨 무례한 상품인가 싶었지만 홈쇼핑 PD가 상품을 고른다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없기에 방송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홈쇼핑은 처음인 업체와 컨셉이 막막한 MD를 다독이며 1차 미팅을 진행했습니다. 저도 무알콜 맥주는 처음이라 일단 상품에 대한 정보를 묵묵히 들으며 대체 이 놈을 어떻게 팔아야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1차 회의가 끝난 후 우리의 결론은 하나였습니


"망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살 리가 없고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텐데.. 대체 누구한테 팔지??  

서로가 '허허 이것 참'만 반복하다 미팅은 끝났습니다.

그때부터 숙제는 온전히 PD의 몫입니다. 어떤 컨셉으로 팔 것인지, 스튜디오는 어떻게 꾸밀 건지, 어떤 호스트에게 어떤 멘트를 요청할 것인지, 시청자들에게 보이는 자막은 어떻게 쓸 것인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 끝에 술은 못 마시지만 술자리에서 어색하지 않게 어울리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술을 너무 마시고 싶은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술은 못 마시고 그나마 비슷한 맛이라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이 종종 무알콜 맥주를  찾는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타깃을 정했으니 한 시간 방송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 고민할 차례. 호스트가 추가된 2차 미팅 때 그런 상황에 있는 모습을 사전 촬영해서 방송에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전 촬영물에 호스트가 출연하면 너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 보이고 아무나 불러 무작정 그 상황처럼 찍기에는 부자연스러움이 예상되었습니다.

촬영 대상 물색에 어려움을 찾던 중 저에게 한줄기 빛이 찾아왔습니다. 마침 대학교 축제 시즌이었고 대학 후배에게서 축제 때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아무개야! 과 학생들 다 술 잘 마시는 건 아니지? 그럼 그냥 물 마시냐??"

"네 근데 분위기 얼큰해지면 주변에서 억지로 술 권하기도 하고 그래요. 늘 사고 날까 걱정이죠 뭐"


이거다 싶은 마음에 무알콜 맥주 몇 박스 협찬해줄 테니 우리 과 후배들 노는 것 좀 촬영하자 그랬더니 흔쾌히 좋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축제 당일 카메라 감독과 호스트 한 명 그리고 저 이렇게 무알콜 맥주를 바리바리 싸들고 학교를 방문했고 술을 못 마시는 친구들도 무알콜 맥주를 통해 무리 없이 모임에 어울리는 모습은 물론 덤으로 대학 축제의 흥겨움까지 카메라에 담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취할 걱정 없이 신나게 놀 수 있다"

이 날 촬영 후 이것이 우리 방송의 컨셉이 되었고 생방송 전날 스튜디오를 클럽처럼 꾸며달라고 세트 감독에게 요청했습니다. 홈쇼핑 역사상 그런 적이 없었기에 세트 감독은 만들어는 주는데 책임은 못 진다며 난감해했고 저는 무리 없는 선에서 협의를 봤습니다. 또한 클럽의 느낌을 내기 위한 몇 명의 모델들을 섭외해서 스튜디오 배경에서 자유롭게 춤춰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너무 순조로웠던 탓이었을까요? 대망의 방송 당일 오전. 호스트로부터 미끄러져 팔이 부러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연락을 받았습니다. 한 달이 넘게 컨셉을 공유하고 준비해온 호스트가 방송 당일 아웃이라니. 업체와 협의한 편성을 마음대로 빼거나 미룰 수도 없고 결국 대체 호스트가 긴급히 투입되었습니다. 급하게 컨셉과 방송 전략에 대해 전달하는데 노련한 호스트도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저는 오죽했을까요.

저를 더 긴장케 했던 건 매출 쪽박을 대비해서 다른 프로그램을 뒤에 대기시켜놓겠다고 한 편성 담당 팀의 공지 메일이었습니다. 중요한 방송 전에 힘을 주지는 못할 망정!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걱정 속에 방송은 시작되었고 번쩍이는 조명과 춤추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호스트의 우렁찬 멘트가 tv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맥주캔을 들고 있는데요, 혹시 술을 마시면서 방송을 하나 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근데 이건 진짜 술이 아닙니다! 저희가 이렇게 춤을 추며 술을 마시는 것 같지만 이건 무알콜 맥주예요! 홈쇼핑에서 이런 장면 상상이나 해보셨을까요?"

쉴 새 없는 호스트들의 멘트를 체크하며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영상을 스탠바이 시키고 실시간 주문 현황을 보며 그때그때 적절한 자막을 내보냈습니다.

이때부터 홈쇼핑의 진정한 묘미가 시작됩니다. 홈쇼핑 PD의 가장 필요한 능력이자 재미이자 힘든 점 중의 하나인 생방송 진행과 변수 대처가 빛을 발해야 하는 시간.

처음 보는 상품에 고객들의 질문이 쏟아졌고 고객대응팀과 MD, 업체가 덩달아 바빠졌습니다. 첫 설명이 끝나고 미리 준비했던 대학 죽체 영상이 나갈 때쯤 주문이 말도 안 되게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중간중간 남은 수량을 체크하던 MD가 방송 시작 25분 만에 남은 수량이 거의 없다는 연락을 해왔고 30분 만에 준비한 수량이 모두 팔려 매진을 알리고 방송을 끝냈습니다.

 한 방송을 성공적으로 끝냈다는 성취감과 모두가 걱정했던 상품을 보란 듯이 팔았다는 쾌감이 몰려와 그날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누군가 저에게 홈쇼핑 PD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을 묻는다면 이런 보람과 재미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좋은 상품을 좋은 가격으로 시청자들에게 소개해서 인정받는 것. 홈쇼핑에서 그것보다 보람된 일이 어디 있을까요. 

갑질이다 고객 기만이다 욕먹기 바쁜 홈쇼핑이지만 이 곳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 다니는 직장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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