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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당신을 위한 시
장석남_부엌
by
닝닝하고 밍밍한
Jul 13. 2023
부엌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
만한 곳은 역시 부엌밖에 달리 없지.
커피를 마시자고 조용조용히 덜그럭대는 그 소리는 방
금 내가 생각하다 놔둔 시 같고, (오, 시 같고)
쪽창문에 몇 방울의 흔적을 보이며 막 지나치는 빗발
은 나에게만 다가와 몸을 보이고 저만큼 멀어져가는 허
공의 유혹 같아 마음 달뜨고, (오, 시 같고)
매일매일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고요의 이 반질반질한
빛들을 나는 사진으로라도 찍어볼까? 가스레인지 위
의 파란 불꽃은 어디에 꽂아두고 싶도록 어여쁘기도 하
여라.
내가 빠져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엌의 공기
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또 시 같고, 공기 속의 그릇
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고요히 명징한 내용을 담고 있
어, 읽다가 먼 데 보는 오 얄팍한 은색 시집 같고,
_장석남, 『젖은 눈』에서
*
늦은 밤에 마시는 커피는 일종의 결연함이 있다.
시 쓰기의 불능을 가까스로 지연하고자 취하는 일종의 방식이므로.
시는 왜 그런 순간에만 찾아오는지, 아니 그런 순간에도 찾아오지 않는지.
드물게 날카로운 순간을 만날 때 가엽고 환한 시 같은 것들이 내게로 온다.
그러기 위해 나는 매일 허물어지는 내가 된다.
‘내가 생각하다 놔둔 시’는 나를 처음처럼 달래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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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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