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뻔뻔한 영화평 - 21> '충칭'이냐'청킹'이냐 이거이 문제다
# 임청하 얼굴이 보고 싶다면 이 영화 보지 마. 단 한 번도 짙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아
# 사실 임청하의 은퇴작이다. 41세의 나이에 이 영화를 찍고 은퇴했다.
# '중경'이라는 한자를 '충칭'이라고 읽느냐 '청킹'이라고 읽느냐. 이거 홍콩 사람들에게는 꽤 중요하다.
홍콩 여행 가서 "청킹"이라고 읽는 게 나을걸. 대륙에서 온 진상으로 오해받기 싫으면...
# 북경 표준어만 아는 대륙 중국인들은 '홍콩'이라고 부르지 않아. 중화인민공화국 표준어로는 '샹캉'이다.
# '샹캉'이라는 말 처음 들어 본 사람이라면 홍콩 현대사에 대해 공부 좀 하고 이 영화 보는 게 좋을 듯.
# 임청하가 맡은 역에는 배역명도 없다. 엔딩 크레디트에도 나오지 않는다.
# 제목의 중경은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는 유명 건물 '청킹맨션(重慶大厦)'에서 따온 것이다.
청킹맨션은 홍콩 구룡반도 중심가에 있는 오래된 상업 건물로 예전에는 마약 유통이나 절도,
강도 같은 범죄들이 빈번했다고. 삼림(森林)은 주변의 빌딩숲을 의미한다.
2025년 지금 들어가 보아도 인도인 삐끼가 가득하다. 별로 변하지 않았다.
#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도 여전하다. 왕페이는 볼 수 없지만.
# 왕가위 감독이 '동사서독'을 찍던 중 너무 힘들어 기분 전환이나 하려고 '중경삼림'을 만들었다는
썰이 있다. 실제로 23일 정도의 촬영 기간과 2달의 편집 기간이 걸렸다.
# 여러 가지 중의적 의미도 담겼지만 그냥 연애 영화로 보는 게 최고다.
# 금성무가 한국어도 한다. 볼 사람은 잘 찾아보시라!
# 영화의 1부에서 2부의 등장인물들이 잠깐씩 등장한다. '공통씬'이라고 우리나라 '테마게임'이라는
코미디 드라마에서 많이 써먹었다. 어떻게 아냐고? 그건 비밀.
# 뻔뻔 평점 $$$$$$ (6개다 6개! 연애 영화는 중경삼림 전후로 나뉜다 끝.)
1994년, 왕가위는 홍콩의 미래를 직접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 불안을 사람들의 얼굴과 골목의 네온, 통조림 라벨에 새겨 넣었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 모든 것을, 흐릿하게 그러나 지워지지 않게 담았다.
금발 가발, 레인코트, 선글라스—임청하의 복장은 패션이 아니라 방탄복이다. 중국 공산당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파트너라는 것을 나타내는 듯.
홍콩인들이 곧 마주해야 하지만 끝내 선글라스를 벗길 수 없는 얼굴. 그녀가 주요 배역 중 유일하게 북경어를 쓰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더 노골적이다.
게다가 그녀의 직업은 마약 밀매상. 아편전쟁 이후 영국에 할양됐던 홍콩의 역사와, 통제력을 잃었던 중국의 상처가 겹쳐진다. 영국이 아편을 인도에서 재배해서 당시 청나라에 파는 무역을 벌였는데, 이 영화 속 마약 밀매에도 인도인이 등장한다.
광둥어, 영어, 북경어, 일본어를 자연스럽게 섞는 하지무(금성무)는 동서양이 뒤섞인 홍콩의 화신이다. 그러나 그가 집착하는 건 유통기한이 박힌 파인애플 통조림.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으로…”라는 독백은 곧 1997년 7월 1일, 홍콩반환이라는 불가피한 시한을 가리킨다. 영국이 반환해도 50년간 ‘일국양제’를 지키겠다는 약속조차 결국 끝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사다.
둘의 만남은 교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같은 공간, 같은 밤이지만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녀는 아무 확신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난다. 이해와 융합이 불가능한 홍콩과 중국의 관계를, 사랑 대신 공허로 그려낸 결말이다.
양조위(경찰 663)는 과거의 소품들과 대화한다. 젖은 수건, 닳은 비누, 눈물 흘리는 인형. 영국 식민지 시절의 추억에 매달리는 홍콩의 초상이다. 전 여자친구가 ‘스튜어디스’라는 설정은 언제든 떠날 수 있었던 영국을 닮았다.
반면 왕페이(페이)는 공간을 바꾼다. 몰래 집에 들어가 낡은 물건을 새것으로, 빈 어항에 새로운 물고기를 넣는다. 불확실한 미래를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바꾸려는 태도. 샐러드 가게에서 반복 재생되는〈California Dreamin’〉은 서구적 자유와 도피의 환상을 담은 배경음악이자, 중국 편입을 원치 않는 잠재적 욕망의 사운드트랙이다.
결국 그녀는 꿈꾸던 캘리포니아로 떠났다가, 1년 후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온다. 그 사이 경찰 663은 샐러드 가게를 인수해 그녀를 맞는다. “어디로 가고 싶어요?”라는 질문과 탑승권 한 장—결말은 닫히지 않는다. 미래를 선택하는 건 이제 홍콩인의 몫이다.
왕가위와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은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좁은 골목의 공기를 찍는다. 시야를 가르고 스치는 네온은 인물들의 심리처럼 불안정하다. 스텝프린팅으로 인물의 걸음을 느리게 찢어놓으면,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버벅거린다. 반환을 앞둔 도시의 체감 속도를 영상으로 번역한 기법이다.
색채 역시 전략적이다. 초록빛은 고독, 붉은빛은 불안과 욕망, 노란빛은 잠깐 스치는 희망. 왕가위는 이 세 가지 온도로 홍콩의 심리를 조명한다.
《중경삼림》은 1997년을 앞둔 홍콩을 기록한 역사 영화이자, 사랑과 이별, 불안과 도피를 그린 청춘 영화다. 한쪽 눈으로는 정치적 은유를, 다른 한쪽 눈으로는 보편적 외로움을 본다. 그래서 이 영화는 90년대 홍콩의 것이면서도, 오늘날 도시 청춘 모두의 것이다.
유통기한 앞에서 흔들리고, 스쳐 가는 인연에 마음이 저리며,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고집하는 사람들. 왕가위는 그들을 스텝프린팅 속에, 네온빛 그림자 속에, 파인애플 캔 라벨 속에 담았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프레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평이라고 쓰기는 썼지만 이 영화는 그냥 기막히게 잘 만든 청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