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지내?"
최근 오랜만에 연락 온 지인이 안부를 물었다. “어떻게 지내?” 그 말에 되돌아본 나의 일상. 요즘 하루하루를 취미생활로 꼭꼭 채워 풍요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 독서를 하고, 명상을 하고 직접 나를 위한 밥상을 차려먹고 좋은 잠을 자고, 일을 하고. 이런 일상이 주는 풍요가 더 크지만 그 사이사이 들어가 있는 취미생활이 작고 소소한 삶의 즐거움을 더해주고있다. 예전부터 나는 소소하게는 원 데이 클래스로 꽃꽂이, 도예, 비누 만들기, 베이킹, 요리 클래스, 위스키를 배웠었고,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코바늘, 유화, 비즈공예, 테니스, 스쿼시, 드로잉,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기도 했었다. 워낙 새로움과 배움, 경험을 즐거워하는 나에게는 늘 ‘취미 부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음주도 취미생활이었다면 취미생활이었을 텐데, 예전에는 정말 음주 가무를 즐겼다. 최근 몇 년사이 자연스럽게 음주가 줄었는데, 나의 바뀐 성향도 한 몫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근무시간의 변화였다. 직업을 변경하며 근무시간이 오후로 바뀌었는데, 자연스레 저녁시간에 친구들과의 약속이 줄고 낮에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요즘 취미생활의 절정을달리고있고 정말 ‘취미 부자’가 된 기분을 한껏 느끼고 있다.
일단 매일 아침 클래식을 한 곡씩 들으며 작곡가에 대해 알아가고, 내 취향을 발견해 나가고 있다. 오케스트라, 독주, 4중주, 5중주 각각의 매력을 느끼면서 음악에만 오롯이 집중해 보며 아침을 시작한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요가원에 가서 명상으로 시작해서 한 시간반의 수행과 집중과 평온과 약간의 고문이 결합된 시간을 통과하고 난 후 선생님과 다른 수행자들과 함께 보이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다. 매주 보는 분들도 있고, 새롭게 보게 되는 분들도 있는데 도란도란 앉아 어느 날은 바이올리니스트와, 어느 날은 제빵사와, 어느 날은 또 다른 요가원의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어느새 삶의 지평이 넓어져있다.
일주일에 두 번은 퇴근 후 복싱장으로 향한다. 아직은 초보라 기본기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느긋한 나와는 달리 관장님은 마음이 급해 보이신다. “상대방을 쓰러트리려면 체중을 다 실어야 해.”. “선수처럼 폼이 좋아지려면 체육관 나오지 않는 날도 연습을 해야 해.” 그러면 나는 속으로 ‘나는 누구를 때릴 생각이 없는데..’, ‘나는 선수처럼 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게 되고 그런 마음이 들킬까 애써 웃어본다. 얼마전에 트라우마와 관련된 책을 읽다가 한 여성이 과거에 폭행을 당한 후 체육활동으로 폭행에 대항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고, 이후 길거리에서 몇몇 남성들이 시비를 걸었을 때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어디 한번 덤벼보라고!”라며 폼을 잡은 이야기를 접하였다. 복싱을 하면서 나도 그런 상황이 오면 멋지게 폼을 잡아봐야지라는 상상으로 관장님의 기대에 부응해 본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오전, 수채화 가방을 들고 자전거에 올라탄다. 수채화는 구에서 하는 계절 프로그램을 신청하였는데 첫날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강의실을 잘못 들어온 줄 착각했다. 내가 신청한 건 분명 초급반이었는데, 다른 수강생분들은 이미 앉아서 각자의 ‘작품’에 열중하고 계셨다. 강의실을 다시 확인해 보니 이곳이 맞았다. 오히려 선생님도 나를 보고 당황하였다. “아, 새로운 수강생이 신청했군요.” 알고 보니 이곳은 이름만 초급이지 몇 년째 이미 수업을 들으며 실력을 쌓은 ‘재야의 고수’들이 모인 곳 이었다. 모두들 나이가 지긋하신 선생님들이신데,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수다도 떨고 실없는 소리를 하시다가도 본인 자리에 다시 앉아서 집중을 하시면 주위에서 빛이 났다. 첫날 나는 한 분에게는 종이를, 한 분에게는 붓을, 테이프를. 칼을… 주섬주섬 빌려서 내가 가져온 ‘곰돌이 푸우 물감’을 꺼내 겨우 색을 칠했다. 유치원생 시절 화가의 꿈은 일찌감치 접었지만 나의 내면 아이는 포기를 못했는지 드로잉, 유화에 이어 이제는 수채화까지 시도를 해보고 있다. 이 역시 하다가 내 마음대로 안된다며 짜증을 내고 그만둘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완벽함에 대한 기대를 한층 내려놓고 조금 더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이번에는…?’이라고 기대를 걸어본다.
한 주의 마지막. 일요일에는 클래식 대신 우리 집에 하와이안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일주일 만에 훌라를 추러 가는 날인데, 일주일 동안 연습해야지 하고 못한 죄책감을 노래를 들으며 달래본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마지막 양심으로 지난주에 찍어둔 영상을 복습한다. 그리고 드디어 연습실에 도착. 선생님이 “알로하~”라고 웃으며 나를 맞아주신다. 수업 시작 전, 모여앉아 일주일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하며 시작한다. 서로 좋은 일, 힘들었던 일 공유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마음을 와이키키 해변으로 보낸다. 골반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나는 왜 손가락마저 뻣뻣한가라는 생각을 하며 그래도 얼굴에는 미소를 지어본다. 노래가 좋은 달에는 노래에 취해 과하게 고개를 까딱거리다 보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얼굴만 움직이는 인형이 생각난다. 그렇게 한 시간동안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다보면 정말 마음만큼은 가본 적도 없는 하와이에 다녀온다. 일요일에 여유롭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아, 귀찮다.’라는 저항감이 먼저 올라온다. 그래도 역시 훌라춤을 추고오면 일주일 마무리를 잘 했다는 만족감이 다시 또 한번 저항감을 기대감으로 바꾸게 도와준다.
요즘 누가 나의 일상을 물으면 “요가하고, 복싱하고, 훌라도 추고, 클래식도 듣고, 책도 읽고,그림도 그리고..뭐 그러고 지내.”라고 대답한다. 얼마 전에 팟캐스트를 듣다가 ‘60살에는 뭐 하고 지내고 있을것 같은지’에 대한 질문이 나와서 생각해 봤다. 요가하고, 운동하고, 훌라 추고, 클래식 듣고, 책 읽고,그림도 그리고 싶다고. 그리고 누가 물어보기 전에 말 해줘야겠다. “나 있잖아, 사실 부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