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멈추는 새로운 시작
발리에 도착 후, 짱구 근처에 있는 리트릿 센터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바깥세상(?)으로 나와 우붓으로 이동했다. 숙소에 도착 후 근처를 걷다 보니 Tea House 가 있어서 들어가 봤다. 발리산 차는 어떤 맛일까. 직원분이 차를 따라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내일이면 녜삐데이(Nyepi Day)인데, 먹을 것 좀 준비해 놨어?"
"응? 녜삐데이가 뭔데?"
"발리 새해이자 연휴야. 아무도 밖에 못 나가."
얼른 스펠링을 물어봐서 인터넷 검색창에 검색을 해보았다. Nyepi는 힌두식 사카달력의 새해를 의미했다. 새벽 6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24시간 동안 아무도 집 밖을 나가지 않고,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집 안에서 머물며 스스로에게 의식을 두고 시작하는 날이었다. No Work, No Travel, No Entertainment, No Food, No Talking, No Sleeping. 이것이 녜삐데이의 규칙이었다. 모든 것이, 심지어 공항도 멈추는 날이었다.
녜삐데이 전 날에는 ogoh-ogoh 퍼레이드가 있는데, 온갖 무섭게 생긴 악귀들의 모형을 흔들며 행진을 해서 모든 악령과 나쁜 기운들을 끌여들인 다음, 태워버리는 행사이다. 이렇게 악령을 불러 모은 뒤 태워버리고 나서도 미처 떠나보내지 못한 사악한 기운이 마을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다음날에는 Nyepi, Silent day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거리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악령이 마을을 그냥 떠나도록.
여행을 준비하면서 지내게 될 나라와 날짜정도만 대략 정했던 터라 지내는 동안의 세부사항은 전혀 모른 채로 도착을 했다. 하루동안 모든 것이 멈추는 날 이라니. 일 년의 한 번뿐인 행사에 참여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그래서 No Travel, No Food, No Talking 정도를 함께 실천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 날 잠시 참여했던 Ogoh-Ogoh 행사에서 진행을 하시던 마을 이장님같은 분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90% 이상을 무의식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다고. 내일 하루만큼은 무의식이 아닌 의식을 두고 하루를 보내보라고. 내가 묶고 있던 곳에서는 원하면 숙소내부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제공하고 수영장도 사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의식을 두고 몸과 마음을 비워보자라고 생각하였다. 예전에 한참 다이어트를 할 때는 24시간 정도씩 단식을 했던 것이 두어 번 있었다. 어찌나 배고프고 음식생각이 많이 나던지. 그런데 침묵의 날에는 이상하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장기여행자에게는 잘 노는 것만큼이나 잘 쉬는 것이 중요한데, 하루를 잘 쉬며 스스로를 점검해 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을 하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글을 쓰며 하루를 보냈다. 디지털디톡스 까지는 하지 못하였지만 평소보다는 핸드폰도 조금 멀리하였다. 작은 숙소였기 때문에 정말 조용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오후가 되어 잠시 숙소 내부를 산책할 겸 나가보았다. 대문 근처로 나가서 문을 살짝 열고 머리만 빼꼼 내밀어 거리를 슬쩍 보니 정말 거리가 고요히 멈춰있었다. 평소라면 차에, 오토바이로 정신이 없는 도로인데 강아지 한 두 마리만 거리의 주인처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멈출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날이었다. 모두가 강제로 모든 것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날. 물론 녜삐데이가 오기 전 몇몇 발리 사람들에게 금식을 할 건지, 뭘 할 예정인지 물어보니 정말 '수행'을 한다는 사람은 드물었다.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해 놓는 다던 상점 직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거라던 거리의 상인. 친구들과 모여서 카드게임을 하던 숙소사장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고 침묵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날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1월 1일, 설날에 이어 3월. 3번의 새 출발의 기회를 얻는다던데, 발리에서 한 번 더 새해를 맞이했다.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