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아파줄 수 없어서...
티격태격 변호사 가족의 일상
고등학생이 된 아들이 첫 시험을 본 후 울면서 전화했다. 목표했던 점수보다 훨씬 못 미치는 점수가 나올 것 같다고 했다. 남자의 눈물은 쉽게 흘리는 게 아니랬는데... 평소 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들이었기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엉엉 소리가 낯설고도 가슴 아팠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서 또 다른 지경의 삶이 펼쳐지는 것 같다. 먹이고 재우고 아프면 밤을 새워 간호하고... 이런 것이 육아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아, 그때도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지금은 대신 아파주고 싶은 것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나도 나의 아이처럼 엄마를 붙들고 엉엉 울었던 적이 몇 번이었을까. 그때는 아픈 내 마음만 보느라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걸 몰랐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엄마는 나의 감정의 파도를 다 받아주고도 남을 정도로 단단한 방파제같이 느껴졌었다.
"엄마는 그 어려운 환경에서 도대체 어떻게 우리를 키웠어요?"
이제야 뒤늦게 묻는 질문에 엄마는 너희들은 별로 속 썩이지 않았다고 편하게 키웠다고 대답하신다. 그럴 리 없었다. 그러나 나도 나중에 나중에 아들에게는 그리 대답하겠지.
얼마 전에 목사님께서 중년이 되어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더 이상 기도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사춘기 자녀가 있는 것이라 하셨다. 기도하라고. 무릎 꿇으라고. 그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사춘기 자녀는 나태했던 나의 신앙 또한 새로운 지경으로 이끄는 것 같다. 자녀 대신 아파줄 수 없어서 아픈 부모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기 위해 인간이 되어 묵묵히 수난의 길을 걸으셨다는,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깊이와 넓이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