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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지 Dec 11. 2021

파도의 생각

5. 독립, 생츄어리

이즈음인 것 같다. 한 해가 끝나가는 걸 핑계로 약속이 하나둘 잡히는 시기. 생일과 기념일, 온갖 모임에 크리스마스까지.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한 번쯤 고민해야 하는 이벤트들이 밀려오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선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다. 선물 받을 사람에게 뭘 받고 싶냐고 물어보는 게 가장 보편적이겠지만, 요즘엔 감염병의 대유행으로 여럿이 모이는 기회가 드물어서 그런가. 카카오톡 기프티콘으로 커피케이크를 보내거나 대충 비슷한 연령대에서 많이 주고받는다고 하는 선물 목록을 참고해서 톡을 보내고 택배를 받는 게 보다 주류인 것 같기도 하다. 


나 역시 상대에게 가지고 싶은 걸 물어보는 편인데, 아끼는 이들에게는 뭘 더 얹어 줄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셀프로 고통의 시간을 갖는 편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그렇게 고민하는 과정을 제법 좋아한다. 선물을 고르는 일이 그와의 추억을 따라가고 함께 웃었던 일들을 하나씩 돌이켜보면서 내가 인지하는 상대를 새삼스럽게 정의하고 조합하는 과정 같아서 그렇다.


동시에 내가 그렇게 아끼는 누군가가 역으로 나에게 갖고 싶은 것을 물어보거나, 어떤 범위 안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거나, 나를 떠올리면서 선물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나'라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그 속에서 나의 이미지가 그저 부유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의 색, 선, 문장, 사진, 분위기가 떠오르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 속에서 명확하게 실존하는 사람이고 싶다. 


휙 지나칠 법한 미세한 것들에 하나씩 하나씩 애정을 담는 일. 나만의 시시콜콜한 취향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당연한 소리지만 자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일관된 기준을 세울 수 없어서, 열심히 지어 올린 것이 파도 한 번에 허물어져 버리는 모래성임을 알게 된다. 


나는 모래를 콘크리트로 만드는 방법을 샴푸를 통해 알았다. 자취를 시작하면서 무조건 100ml로 나눈 가격이 제일 싼 것도 써보고, 주위에서 추천해주는 향이 좋은 것도 써보고,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패키지 디자인이 예쁜 것도 써보고, 비싼 건 뭐가 다른가? 해서 브랜드 제품을 써보고, 요즘엔 이런 기능이 좋다고 하는 것도 써보고, 친환경 제품도 써보고. 샴푸 하나에 대한 무수한 도전을 거치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향과 질감도 알았고 가격과 성능 사이 나만의 우선순위를 알게 됐다. 내가 살면서 그동안 비운 샴푸통이 수십 개는 넘을 텐데. 이제야 사보고 싶은 것과 굳이? 싶은 것들을 사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됐다니. 


가족을 포함해 타인과 함께 산다는 건 당신만의 샴푸 취향을, 삶의 취향을 독립된 형태로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과 공유하고 있는 관계가 얼마나 안정적이고 긍정적이냐와는 별개의 문제다. 하나의 객체로 당신의 삶을 당신의 것으로 채우기 위해선 개인의 선택으로 오롯하게 채울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 필요하다. 홀로 마음껏 지낼 수 있는 온전하고 안전한 공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로 가득한 순간. 


세상에는 아직 자신만의 방을 갖지 못한 이들이 있다. 자신이 본래 속해야 하는 곳에서 격리되어 삶을 빼앗긴 이들이 많다. 좁은 우리에 갇혀서 그저 숨 쉬고 있을 뿐, 살아있지 못한 존재들. 용인에서 탈출한 곰 소식을 읽으면서 나는 그들의 독립을 생각했다. 우리에서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반달가슴곰들. 번식만을 위한 강아지 공장에서 다리가 부러진 채 갇혀있는 개들. 닭장에서 하루 만에 죽어야 하는 수평아리들.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벨루가들. 그들이 이기심으로 이런 시스템을 만들고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는 방만한 사람들로부터 도망쳐 자유롭게 삶을 살아가는 것을 상상했다.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그들의 독립을 바라다가 생츄어리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집단 중 일부는 당장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 그런 삶을 완전히 빼앗긴 - 동물들의 독립을 위한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 중이었다. 자본주의와 정 반대에 있는 생츄어리가 이 땅에 실현되는 날이 올까. 


지금 이 순간에도 야산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곰 한 마리는 어느 기사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녀석은 태어난 지 겨우 4년 정도 됐다고 한다. 그는 독립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독립할 수 있는 공간도 없다. 너를 위한 생츄어리가 어서 만들어지길, 그런 이름이 필요 없는 세상이 만들어지길. 도무지 쉽지 않은 기도를 하면서 내가 너에게 그런 선물을 꼭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넉 달 만에 반복된 용인 곰 탈출… 주민들 "사고 날 때만 관심", 뉴시스, 

2021-11-22 20:17, 2021-12-11 접속, https://news.nate.com/view/20211122n34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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