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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 at Work Apr 27. 2024

디자이너는 왜 글을 쓰는가?

내가 지금 글을 쓰려는 이유_2018년 버젼

어릴 적 내가 좋아하는 책들의 여자 주인공들은 모두 글을 썼다. 『작은 아씨들』의 조이는 글을 쓰면서 당당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도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사랑을 얻었다. 『빨강머리 앤』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을 잃지 않는 엄청난 상상력의 힘을 가진 문학소녀였다. 또한 주체적인 여성을 표현하는 작가들은 자신의 시대의 편견에 저항하며 글을 쓰는 여성들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빨려들 듯 읽었던 『제인에어』의 작가 샬롯 브론테, 『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 『피터 래빗』을 쓴 베아트리체 포터까지. 이들을 보며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글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초등학생때 나의 꿈은 서점을 하며 책만 읽으며 사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집안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기 시작했고, 중학교 때는 삼중당 문고 책 뒷면에 있었던 500권 책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성취감에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 작은 글씨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중학생 떄 교내 백일장에서 박완서 수필 중 하나에서 첫 문장을 그대로 흉내 내어 쓴 에세이가 상을 덜컥 받았다. 청소년잡지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티브로 쓴 연극대본이 선정되어 학예제에 연극으로 올려지기도 했지만, 글을 모방했다는 자책감은 왠지 나를 옥죄어 그 이후에는 글쓰기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게다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면서 시각적으로 개념을 보여주고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야’ 라고 생각으로 더욱 글쓰기를 무시했다.


디자이너로 일을 하면서 말로 설득하고 발표하는 일이 많았다. 글보다는 말, MS워드나 훈민정음보다는 파워포인트로 작성하고 발표했다. 말로 설득하는 일은 재밌었고 언제나 시각적인 자료와 함께 하는 말에 사람들은 잘 설득당해 주었다. 말은 쉬웠지만 글은 어려웠다. “나는 한국 주입식 교육의 산물이야” 라며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지만, 그때그때 넘기며 살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경험과 지식을 어떻게 하나의 자산으로 전달하고 남길 것인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파워포인트로 결과물을 발표하며 프로젝트를 완성하지만, 지식이 제대로 쌓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표를 듣는 사람들 외에는 그 내용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다 충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40대 중반, 교수를 그만두고 미얀마 양곤에서 사회적 기업인 프락시미티 디자인 (Proximity Designs)에서 서비스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다. 디자인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미얀마 직원들과 함께 미얀마농부들을 위한 스마트폰을 활용한 농업자문 서비스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국제적인 디자인전략컨팅 회사인 프로그(Frog) 출신 디자인 연구가인 얀 칩체이스 (Yan Chipchase)가 미국에서 다국적 디자이너팀을 데리고 와서 과제를 진행했다. 시티뱅크의 펀드를 받은 그의 과제는 회사 내 최정예 디자인 팀과 함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진행되었기에, 부럽기도 한 마음에 그가 어떻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 지켜보았다. 몇 달 후 비슷한 시기에 결과 발표회를 했다. 그의 결과와 비교해서 미얀마 현지인들로 구성된 우리 팀의 결과물이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팀원들과 함께 보람 있고 기분 좋은 뿌듯함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런데 몇 달 후 나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의 프로젝트 결과물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모든 프로젝트의 과정과 결과를 상세히 설명해 놓은 책이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지?" 생각했다. 처음부터 책을 만들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얀마는 놀라울 정도로 축적된 지식이 없는 나라이기에, 책으로 남는 연구 결과는 그 사회에 엄청난 지식으로 남을 수 있음을 알았기에 더욱 놀라웠고, 그들의 성과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의 결과물은 어느 곳이나 전달될 수 있는 지식으로 남아 있고, 나의 100장이 넘는 PPT 결과물은 회사 내 자료로 남았다. 발표자료는 있지만, 그 과제를 제대로 설명할 사람은 이젠 그곳에 없다.


세상에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은 글쓰기에 달려있다. 글로 쓴 것, 기록한 것 만이 남는다. 나의 약점을 이제 더 이상 약점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한다. 나이 오십, 이제는 글을 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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