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위로하는 힘
페퍼 포츠와 브루스 배너가 사랑에 빠진다면 어떨까요?
마크 러팔로와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영화 <땡스 포 쉐어링>을 보며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살짝 들었는데, 화면 위로 빠르게 사라지는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서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어요. 사는 게 무서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는 다양한 인물을 통해 뉴요커들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표현합니다. 주인공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번듯한 직장인이면서도 ‘중독’에 힘들어하는,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영화는 크게 세 개의 이야기로 나눠지는데 그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심인물이 마크 러팔로입니다.
배가 등가죽에 딱 붙을 것 같이 고플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웬만큼 먹어선 배가 차지 않죠. 우선 눈앞에 있는 음식은 순식간에 쓸어 넣고선 다른 먹거리를 찾게 됩니다. 그리고 다 먹고 나서야 ‘하...’하고 후회를 하게 되죠. 마크 러팔로에겐 섹스가 꼭 그렇습니다. 연인과의 섹스로는 충족되지 않죠. 야동과 자위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여자만 봐도 참을 수 없는 욕구에 시달려 성매매도 망설이지 않게 되죠. 섹스 중독, 그가 앓는 병입니다. 다행히 그는 치료와 상담을 통해 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충동을 억눌러 왔습니다. 이제는 웬만한 자극에도 참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죠. 그때 기네스 펠트로와 처음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고 싶은 여자가 마주 앉아 이렇게 말합니다.
“전 애인이 알코올 중독이었다. 다시는 중독자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녀를 놓칠 수 없던 그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음으로써 거짓말을 하게 되지만, 그 거짓은 금세 들통이 납니다. 하지만 조금 늦어버려,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사이가 된 둘. 기네스 펠트로는 이를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술이 아니라 섹스입니다. 대부분의 섹스는 이성과 이루어지기에 결국 둘 사이는 처참하게 깨어지죠. 문제는 그러면서 감정이라는 놈이 요동을 치게 된다는 데 있었습니다. 불안하면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게 되거든요.
최근 남편과 유럽여행을 다녀왔습니다. 46박 48일, 긴 여행이었어요. 1월 1일에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1년 가까이 기대하고 응원받은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퇴사를 했고, 남편은 퇴사를 각오하고 휴가를 받아냈죠. 짐을 싸면서 어찌나 설레던지.
근데 저라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어디에서든 ‘부정적인’ 걸 찾아내는 사람이라서. 한 달 반의 여행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보드카를 싫어하는 사람이 보드카가 잔뜩 든 초콜릿을 한 입에 털어 넣은 경험이었습니다. 낯설고 신기한 마음에 초콜릿을 ‘왕’하고 베어 물었더니 독한 술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그대로 뱉어내기엔 초콜릿의 달달함이 좋은데, 그대로 먹자니 온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먹기 전과 먹은 후가 더 좋은 그런 초콜릿 같았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일상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내 입맛에 딱인 음식으로 기분 좋게 취할 수 있고, 짐을 싸고 푸는 피로가 없으며 낯선 언어, 낯선 문화로 곤란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값진 경험이었지만 우리는 낯설고 어려운 환경에서 쉽게 더 예민해지고 피곤해지고 타인을 믿지 못했기에,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토록 원하던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막연하던 불안이, 여행을 하느라 잊고 있던 불안이 우리 집 문 앞에 떡 하고 서 있었습니다.
‘이제 어쩌려고?’
‘뭐 하려고?’
‘돌아가면 12월이다. 한 달만 지나면 나이는 더 먹을 텐데.’
‘네가 하던 일은 더 이상 하기 싫다며. 그럼 너한텐 어떤 실력이 있는데?’
‘작가 하겠다고 동네방네 떠들던 꼴이 결국 이 모양이냐.’
뭐, 이런 종류의 불안들 있잖아요.
거기다가 될 줄 알았던, (그러니까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건방지게 혼자 김칫국 마시던) 공모전에서도 최종 탈락하며 글을 쓰는 일조차 자신이 없었어요. 그렇게 다시 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다음 날, 남편은 하루를 채 쉬지 못하고 출근을 했고 그때부터 저는 현관문 밖을 나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침대에 누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TV를 봤어요. 예능에서 만든 억지웃음을 짓고 감자탕을 배달시켜 먹고, 먹고 또 먹었습니다. 씻지도 않고 다 먹은 그릇을 치우지도 않았어요.
지금까지 잘 해왔던 것들을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이나 꿈을 찾는 거, 그렇게 거창한 거 말고. 음식을 해 먹거나 씻는 일, 운동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더라고요. 그런 거 한다고 내 삶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런 걸,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상담이 필요한 것 같아 병원에 전화했더니, 가능한 시간이 없다고 하네요. 그렇게 아픈 사람이 많은 가 봐요. 어쩔 수 없이 술이라는 진통제를 부어 넣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는 이틀이, 이틀은 삼일이. 일주일이 지났죠.
늘 남에게 잘 보이려고 살았어요. 어린 시절, 내 주위 사람들은 대체로 내가 뭔가를 잘했을 때 나를 좋아했거든요.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사람처럼 비난받았거든요. 부모님은 내가 잠시 쉬는 걸,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세요. 50년대, 60년대를 살면서 정말 못 먹고사시던 분들이라, 먹고사는 걱정이 그렇게 크시거든요.
그래서 더 불안했나 봐요. 당장이라도 쓸모가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남편이 나를 인정해주고 가족들이 나를 대견스러워할 것 같아서. 그게 아니면 무시당하고 외면당할 텐데. 그렇게 생각했어요.
미안해요. 서론이 길었어요. 주저리주저리. 그냥 이렇게 하소연하고 싶은 날이라서요.
저는 아직도 스스로를 미워하는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꼭 당신이 아픈 것처럼 그렇게 아파요. 숨을 못 쉬겠어요. 그냥 나인 그대로를 사랑하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니네요.
그런데요. 이럴 땐 주변에 누가 있는가가 정말,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괜찮아”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놓치지 마세요.
제가 불안에 떨고 술에 취해 있을 때, 집 안 꼴을 개판으로 해놓고 스스로도 거지꼴로 있을 때 제게 “괜찮다”라고 이야기해주던 사람이 있었어요. 나보다 몸이 힘들 텐데, 퇴근하고 와서 그냥 나를 꼭 안아주던 그 사람 덕분에 저는 다시 일어나 씻고, 요리를 하고, 글을 쓰고 있거든요.
그동안 우리 너무 힘들었잖아요. 위로는커녕, 잠시도 쉬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부모라고 받아주나요, 친구라고 들어주나요, 연인조차 외면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런데 주변에 꼭 한 명 정도는 “괜찮다”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물론 그 사람도 완벽하진 않아요. 그런데 완벽한 거보다 ‘괜찮다’고 이야기할 줄 아는 게 훨씬 멋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괜찮다고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세요.
그리고 우리도 노력해볼래요?
작심삼일을 열 번만 반복해도 한 달이 되듯이. 그렇게 간헐적으로라도 “괜찮다”라고 이야기해볼까요? 저도 내 소중한 사람이 힘들 때 “괜찮다”라고 안아주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노력해보려고요. 연습을 하고 또 하면, 저도 진심을 다해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겠죠? 내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내 주변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또 나에게.
“괜찮아.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괜찮아. 실수해도 괜찮아.”
“괜찮아.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이렇게 내 앞에 있는데.”
그러니까 아무튼, 어쨌든,
다 괜찮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