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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 Feb 29. 2020

아빠는 괜찮은 줄 알았다







지난 설 연휴였다. 친정인 대구에 도착하니 4시 무렵. 


딸과 사위가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셨을 부모님은,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주방에 들어가 이른 저녁상을 준비하셨다. 똑같은 음식인데도 왜 우리 집 음식이 더 맛있는지. 예전에는 맛없게 느껴졌던 반찬들 모두 달고 시원하고 개운했다. 정장 바지를 입고 있던 남편이 숨을 쉬기 힘들어할 만큼 나와 남편 둘 다 겨우 머슴밥 같이 밥이 담겨 있던 그릇을 다 비웠다.     








밥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아빠는 소주 한 병과 소주잔 2 개, 딸이 좋아하는 맥주 한 병과 맥주잔 3개를 들고 오셨다. 그리고 깨강정, 땅콩강정, 사과, 귤, 배, 감, 마른오징어까지 뜯어내셨다. 요즘 어디에 가도 이런 대접을 받기가 힘든데, 내 집에 오니 비로소 귀한 사람대접을 받는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우리 셋의 술상이 펼쳐졌다. 조촐하지만 풍성했고, 화려하진 않지만 영양가 높은 안주들이었다. 우리의 이야기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자기도 한 잔 마시고 싶다며 소주잔을 들고 와서 매실주를 2잔이나 마셨다. 평소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엄마였기에, 홀짝홀짝 잔을 비우는 엄마를 보던 남편은 깜짝 놀랐다. 시간이 얼마 지나자 얼굴이 붉그스름해진 엄마는 “아, 취해서 못 앉아있겠다”며 자리를 뜨셨다.      



기분이 좋아진 아빠는 끊임없이 나와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어찌나 수다스럽던지 반은 듣고 반을 흘려듣던 중, 차마 흘려들을 수 없던 단어가 귀에 꽂혀 들었다. 아빠의 서울 살이 이야기였다.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느라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아빠가, 타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서울이나 대구나 다 못 먹고 살 때였는데도, 서울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다 운이 닿는 한 회사에 버스 정비공으로 취직했다. 당시 회사 이름은 김포 버스였다고 하는데(아빠에게서 들은 회사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의 공항버스 회사라고 했다. 아빠는 일머리가 좋아 대충 이야기해도 말귀를 잘 알아들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아 그 회사에서 꽤나 인정을 받았다. 많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감사함에, 당시 얹혀살던 아빠의 삼촌집에서 왕복 4시간이 걸리는 거리였건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출퇴근을 했다고.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회사에서 새로운 제안이 들어왔다. 월급을 2배로 올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월급이 2배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들뜬 마음으로 경력 입사했건만, 텃세가 만만치 않았다. 아니 차라리 그저 텃세만 부리는 것이었다면 참을 만했겠지, 경력도 짧고 실력도 부족한 후배들이 자신보다 빨리 진급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자괴감에 빠졌다고 한다.      



아빠는 영어를 모른다. A, B, C, D 알파벳도 읽지 못한다. 하이! 헬로! 오케이! 그 이상으로 영어를 쓸 수도 없고 읽을 수도 없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부품의 사용법을 읽을 수가 없으니, 늘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했다. 승진을 하고 직원들을 관리하려면 그 만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배운 게 없으니 몸 쓰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원들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고 했다. 무시를 당해고 고개를 숙여야 했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만 했다. 쓰린 속을 달랠 방법은 술밖에 없었다.     



아빠는 그 회사를 몇 해 다니다 그만두었다고 했다. 본래 다니던 회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고 몇몇 공장에 취직 해 일을 하다가, 개인택시 회사에 수리공으로 입사해 얼마 후엔 택시 기사로 일했고 결국 개인택시를 사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성공하는 듯했으나 택시운전기사를 모욕하는 사람들, 술에 취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상대해야 했다.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못 배운 놈. 왜 그렇게 사냐.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이유로 아빠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렇게 아빠는 늘 술에 취해 살았고, 어디에도 풀 수 없던 화를 우리에게 풀면서 겨우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끝낸 아빠는 “아빠가 니한테 이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는데, 이제 니도 결혼해서 잘 살고 있고 최 서방이 있어 든든해서, 그냥 아빠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라고 쓴웃음을 지으시더니 술잔을 들었다. 혼자 그 잔을 비우게 하고 싶지 않아, 재빨리 잔을 들고 그와 ‘짠’ 했다.     






     

그 밤, 거실에서 TV로 영화 <극한직업>을 보고 있는데 웬 고함 소리가 들렸다. 꼭 귀신을 보고 놀란 듯한 고함이었는데, 아빠의 목소리였다. 엄마의 말소리가 이어졌다. 


“괜찮아, 괜찮다. 아이고, 진짜 와 이러노. 내가 미치겠다.”     


한두 해 전부터 엄마가 그런 말을 했다. 아빠가 자다가 소리를 지른다고. 술을 안 마시는 날은 덜 한데, 술에 많이 취할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지른다고. 


그때는 그저 잠꼬대를 심하게 하는가 보다 싶었는데, 실제로 들어보니 소스라치게 큰 소리였다.      


아빠는 매일 어떤 꿈을 꾸고 있기에 “살려달라”며 소리를 지르는 걸까. 아빠의 이상증세는 몇 해 전 응급실에 실려가던 날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룻밤에 죽다 살아난 아빠는 그 해 개인택시를 팔고 편하게 쉬는 듯했지만, 사실 편한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휴식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시간을 보내려 술을 마시고 다시 또 악몽을 꾼다. 나와 큰 오빠가 악몽에 시달렸던 것처럼.          








아빠는 괜찮을 줄 알았다. 우리에게 화를 내고 엄마에게 성질을 내기에, 그는 속이 편할 줄 알았다. 이제 은퇴까지 했으니 아주 편하게 잘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미워했었다. 그런 그가 너무 얄미워서.


그런데, 오해였다.

아빠도 우리만큼,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더 큰 아픔을 품고 억지로 버티고 있었는 줄 모르겠다. 


같은 어른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아빠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의 전적인 사랑과 응원을 받아본 적 없던 아빠가 지난 40여 년간 사회에서 느꼈을 무력감, 자괴감 그리고 분노에 마음이 시려온다. 왜 아빠는 술에 취해 소리를 질렀는지, 왜 우리에게 밖에 화를 낼 수 없었는지, 이제는 조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만큼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아빠의 삶이 조금 이해되고 아주 많이 가엽다.







Photo by Tina B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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