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계절. 질문보다는 받아낼 대답이 많지만 앙다문 입을 열 수 없는 계절. 층층 놓인 감정을 눌러 밟고 있는 아들은 그 무엇으로부터 멀어지는 동시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과정이 되겠지 그렇게 우리는 믿으며 배낭을 꾸린다.
늘 골골거리는 아들과 알 수 없는 가슴앓이에도 겉으로는 의연해 보이는 아들과 나이를 먹어도 철딱서니 없는 엄마와 함께 떠나는 치앙마이.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표현으로도 위로가 될 수 없지만 이 여행이 잠깐이라도 아픔이 삭제된다면 내일을 기록할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지 않을까.
탑승시간을 기다리며 대한항공 라운지에서의 여유로운 시간. 내포에서 새벽에 집을 나선 큰애는 룸에서 쉬고, 작은아이는 위스키를 나는 와인을 홀짝인다. 집 나가면 몸 고생이고, 집에 있으면 마음고생이라는데 적당한 고생과 낯섦을 찾아 떠나는 여행. 늘 혼자 서성이고 혼자 떠돌던 여행에서 두 아들과 함께는 설렘과 기대가 오늘의 나와 만나고 있다. 창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는 내가 말하지 못하는, 말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대신하는 듯 구름은 가르고 빛을 쪼갠다.
란나 왕조가 세운 '새로운 도시'라는 뜻의 치앙마이. 태국에서 가장 높은 산 도이 인타논 국립공원 트레킹 간다. 온종일 대절한 택시기사와 자연훼손을 감시하고 관광객 보호라는 명목으로 안내 겸 감시원 뒤를 졸졸 따라 오른다. 예전의 작은애는 이쯤이면 수없이 장난처럼 만재, 만재도, 민재하고 이름을 불렀을 텐데, 트레킹 한 발 한 발 내 디딜 때마다 꼭 다문 입. 생각이 깊다.
작은 폭포를 지나고 이름 모를 식물들과 눈 맞춤하다 보니 가슴까지 트이는 풍광이 펼쳐진다. 전망대 아래로 떠다니는 뭉게구름 한 줌 집어 두 아들에게 안겨주고, 우수수 쏟아지는 청색하늘이 투명하여 한 조각 뜯어서 가슴에 달아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 카메라 렌즈에만 담는다.
태국의 마지막 왕 인타논왕의 유언으로 그의 딸 다라가 이곳 탑에 유골을 묻고 제단을 설치하였다는 묘탑을 돌아 라마 9세 왕의 탑 덥고 햇볕 따가워 왕비의 60세 장수 기념탑 건너뛰고 얼음덩어리 서걱거리는 레몬 에이드 찔끔거리다 와치라탄 폭포로 간다.
흰색 꿈을 꾸며 쏟아지는 폭포수 물안개 틈새로 물방울 미스트 온몸을 적신다. 우린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 아픔과 상처를 남기며 살아간다. 나도 모르게 주는 상처와 너도 모르게 받는 상처 속에서 흉터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시작과 끝이 처음인 오늘 바로 지금의 폭포는 모든 근심 다 흘러 보내라는 듯 세차게 쏟아진다.
왼 종일 호텔에서 수영장과 라운지를 오가며 뭉그적거리다 토요 야시장. 와라이보행자 거리는 몰려드는 인파와 탁한 공기로 가득하다. 좀처럼 움직이기 싫어하는 여행을 즐기지 않는 큰 아들. 처음으로 셋이서 떠나온 해외여행.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는 치앙마이를 상징하는 코끼리 그림이 새겨진 셔츠와 바지를 각자의 취향대로 고른 후 숙소로 돌아왔지만 좋지 않은 공기가 큰애의 호흡기를 난타하였는지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야외정원이 몽환적인 촘 카페 레스토랑 점심 후 몬쨈으로 이동하는 중간 코끼리 예뻐해 주는 엘리핀팜 카페, 코끼리들에게 사탕수수와 바나나 먹이 주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작은애는 먹이도 주고 코끼리를 만지며 행복해한다. 코끼리와 서로 교감하면서 해맑게 웃고 있다. 큰애와 난 코끼리가 무서워 접근이 어려운데 환하게 웃는 모습 동심으로 돌아간 듯 어릴 적 꼬맹이 모습이 보인다.
코끼리와 교감 후 즐거워 보이는 작은애와는 달리 큰애 몸 상태는 어제보다 더 나빠졌다. 약국에서 약을 구매하여 먹었지만 별 효과가 없나 보다. 처음으로 온 해외여행에서 즐거워야 할 시간도 잠깐 몸이 아프니 모든 게 귀찮고 힘든지 말을 잃어간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는 아리다는 표현이 사치스럽게 다가온다. 백은선시인은 ‘감정이 언어를 압도할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몸이 몸을 압도할 때도 말을 잃을 수가 있겠다.
몬쨈 몬닝다오 숙소 앞 택시에 내림과 동시 소나기 후 쌍무지개 떴다. 우리의 환영식이다. 몬쨈 글램핑 숙소는 눅눅하고 해발 1,300m 고산지대. 쌀쌀함이 어깨를 건너오고 처음의 풍경인 계단식 밭 푸른 채소와 하얀 돔 텐트 조화롭게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코요테가 다녀간 곳이라 그랬을까 기대와 다르게 습하고 끈끈한 공기에 머물 수 있는 숙소는 아닌 것 같다.
태국식 샤부샤부 무카타로 속을 달래 보지만 춥다. 맑고 투명한 어둠은 밤공기를 타고 찰나와 찰나를 분쇄한다. 잠시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밤하늘 쏟아지는 별들의 홍수. 잠시 생각을 괄호 속에 넣어두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몬쨈의 오늘을 기록하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한 달을 훌쩍 넘은 어느 일요일. 주말 근무라 말하던 아들은 출근은커녕, 오후 2시쯤 방을 나오면서 나를 부른다.
“야! 김민재”
“왜 부르는데”
“왜 그렇게 못생길 수가 있어”
“어디가 못생겼는데”
“그건 어디라고 말할 수가 없어”
“성형으로 커버해 볼까”
“견적을 낼 수가 없어”
"성형해 줄 의향이 없다는 거겠지"
모든 존재들의 내면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해하려 말고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누구나 상처 난 부위는 아물겠지만 흉터는 남겠지. 내 삶이 그랬던 것처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들 그 어디쯤에서 우리 삶은 잠시 머물다 간다.
나를 민재라 부르는 아들. 여행이 준 여유일까. 또 실없는 장난기가 발동한다.
오래전 아들과 동유럽 여행 중 체스키크룸로프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사장은 아들과 엄마의 여행은 보기 드물지만 보기 좋다고 하면서 아들에게 엄마 이름을 불러주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름을 부르며 여행 중이었는데.
오늘처럼 아들이 엄마의 보통명사 보다 민재라는 고유명사로 불러주는 지금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