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라 작가의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의 책 표지가 스웨덴의 화가 리카르드 베르그 『북유럽의 여름밤』이다. 책 표지를 본 순간 북유럽의 여름밤은 어떤 풍경으로 내게 다가올까 오랫동안 꿈꾸며 가고 싶은 나라의 1순위에 얹어 놓았다. 베르그의 작품 속 여성은 가수 카린 픽이고 남성은 스웨덴의 오스카 2세의 아들 유진 왕자가 모델이며 서로의 간격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풍경 속 두 남녀의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온 설렘이었고, 북유럽 속으로 빠져들고 싶다는 강한 유혹에 밤을 설친 날들이었다.
리카르드 베르그 - 북유럽의 여름밤
친구 L의 오랜 모임 속 본 책이 아닌 별책부록으로 끼어든 나의 북유럽 4개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친구를 제외한 6명의 얼굴들은 낯설었고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고 나는 또 얼마나 고군분투하여야 할까
코펜하겐은 1445년 덴마크의 수도이자 왕실 거주지로 외레순 해협의 남단에 있는 셸란 섬에 있다.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2년 동안 점령당했고, 19세기 초반에는 영국의 폭격을 받기도 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 도로를 메운 자전거 행렬 그리고 허공에 대롱대롱 선과 선의 교차로 가로등이 인상적이다. 단단하게 뿌리를 박고 기둥으로 사는 우리나라 가로등의 든든함과 거미줄 같은 실선으로 공중에 매달려 위태로운 생을 잇는 코펜하겐 가로등이 서러워 보인다.
코펜하겐의 가로등처럼 나도 한때 허공에 매달린 채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은 아슬아슬 곡예하듯이 슬픈 삶을 살았던 적이 있다. 뿌리내릴 기둥도 없이 흔들거리는 삶. 밤은 안 보이는 것을 보지 않아도 좋은 시간이지만 가로등 빛은 보이지 않아도 좋을 것을 보여주는 나쁜 시간이었던 아픈 삶이 지나갔다.
프레데릭 교회
아말리엔보르 궁전
여행에서 날씨가 건네는 악수는 포근한 따뜻함과 냉랭한 차가움이 구획을 나눈다. 오늘의 코펜하겐은 차가움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목숨을 잃은 선원들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분수로 신화에 나오는 풍요의 여신 '게피온'이 네 마리의 황소로 변신한 아들들에게 채찍질을 하며 몰고 가는 조각상은 흐리고 우중충한 날씨에 풍경을 지우고 있다.
유럽 3대 썰렁 관광명소로 독일 ‘로렐라이 언덕’, 덴마크 코펜하겐 ‘작은 인어상’, 벨기에 브뤼셀 ‘오줌 누는 꼬마상’이라 불리는 카스텔레 요새 옆 해변의 '인어공주'상은 전체길이 80cm. 인간의 모습을 한 물의 정령 ‘운디네’ 모티브로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에서 영감을 받아 1913년 에드바르드 에릭센이 제작하였다. 머리는 덴마크의 유명 발레리나인 엘렌 프리세를 모델로 하여 만들었지만, 몸 부분은 프리세가 모델이 되는 것을 거부해 작가의 부인인 엘리네 에릭센이 모델이라 한다.
잔뜩 먹구름진 하늘을 닮은 듯 카스텔레 해변의 물과 먹색이 포개진 물먹색 인어공주 청동상은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왠지 처연해 보인다. 관광객들 각자 포즈를 취하고 기념사진 남기는데 슬퍼 보이는 모습이 싫어 발길을 돌리니 일가족 산책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게피온 분수
소낙비다. 엉겅퀴 빗방울에 엉기고 정박 중인 요트들이 젖어가는 카스텔레 해변 지나 코펜하겐 시청 광장 옆 안데르센 동상 티볼리 공원을 응시하며 생각에 생각을 접고 있다. 티볼리공원은 안데르센의 친구 게오르그 카르스텐션에 만들어진 공원이라 친구를 그리워하는 시선일까. 아이들을 싫어하였지만 어쩌면 아이들과 친구로 남을 수밖에 없는 예언자의 시선일까.
“내 주변에 아이들이 있는 것이 싫으며, 아이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여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한 안데르센. 그러나 티볼리를 방문하는 아이들과 관광객들이 안데르센 동상에서 사진을 찍는다. 안데르센이 원하지 않았지만 항상 그 곁에는 아이들이 있었고 있을 것이란 아이러니함에 나도 그 시선 따라 공원을 응시해 본다. 가로수 우거져 공원은 보이지 않고 놀이기구 타는 아이들의 함성만이 시청 앞 광장 ‘용의 분수’ 물줄기로 흐르고 있다.
스트뢰게트 쇼핑 거리 잠깐의 자유시간을 어슬렁어슬렁 100 크로네의 코펜하겐 에코백 나에게 선물한다. 이곳 내가 스쳐간 흔적이라 이름 붙이며 출렁이는 마음을 가방 속에 접어 넣으며 무언가를 놓고 온 기분은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나는 무엇을 공부하고 갔을까. 덴마크의 역사, 문화, 건축, 예술, 볼거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였고 가이드의 설명을 기대했던 안일함에 놓치고 온 것들이 너무 많다. 제대로 된 안내가 부족한 가이드의 불성실함이 서운하고 안타까웠던 여행 중 코펜하겐 시청사의 엔스 올슨 천문시계와 만나지 못함이다.
시청사
용의 분수
안데르센 동상
스트뢰게트 거리
레고 기념품 가계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는 게 없어 보지 못한 나를 위로하며 ‘새로운 항구’를 뜻하는 뉘하운 보트투어 선택 관광을 신청하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만든다. 주어진 2시간은 패기지가 아닌 혼자만의 자유투어다.
행복은 그렇게도 온다. 잠시 32명의 공동체에서 삐져나온 자유로 만끽하는 행복도수는 100도. 마음이 바쁘다. 사과파이를 쪼개듯 시간과 나를 쪼개어 본다. 운하 따라 색색의 옷을 입은 건물들이 영감이 되어 레고 장난감이 탄생되었다는 가게들 기웃거리고, 골목골목을 서성거리며 북유럽 감성의 소품들과 눈인사하고, 노점상인과 흥정하는 관광객의 미소와 운하를 배경으로 구겨진 마음을 뻣뻣하게 펼치고 있는 외국인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운하를 안주삼아 맥주잔이 출렁이는 거리를 지나 버스킹의 선율에 잠시 멈추어 보고, 프리마켓 바닥에 흩어진 신발들 너머로 오페라하우스 웅장함에 넋 놓고 바라본다. 운하에 반영된 유럽풍의 다양한 건축물 감상도 한다. 보트투어를 하였다면 볼 수 없었던 도시의 풍경들과 사람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행복감. 어디를 찍어도 다 담기지 않는 눈부신 광경들. 먼 시간 뒤 내가 다시 여기에 오지 않아도 이 마음을 여기에 소복이 쌓아두고 이 물의 파동을 느끼고 싶다.
자갈길 광장
빛, 빛, 빛 온통 파란색을 띤 하얀 밤. 북유럽의 백야는 늦도록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과 거리가 한 편의 서정시다. 이 도시가 쓰는 시편은 무르지 않고 지루하지 않아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래서일까 덴마크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빛을 이용 일상의 숭고함을 그려내고, 빛을 통해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