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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r 27. 2024

적반하장

 노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김은영! 김은영!     


 직원들은 손나발을 만들어 이름을 불러댔고 일면식도 없는 다른 테이블 사람까지 합세해 앙코르를 요청했다.      

 아. 놔. 내가 미쳤지.      


 후회를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은영의 세계에선 조용히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기로 다짐했건만,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된 듯 보였다. 술이 웬수였다.     

 

 “여러분의 성원에 힘입어 한 곡만 더 올리고 물러나겠습니다.”     


 흥분의 도가니에서 벗어나려면 조용한 곡을 불러야 했다. 마침 가게 구석에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방치된 클래식기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지아는 기타의 먼지를 털어내고 의자를 끌어와 무대 중앙에 놓고 앉았다. 부드럽게 줄을 튕겨 보았다. 잠들어있던 기타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반주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지아는 차분하게 기타를 연주하며 볼 빨간 사춘기의 ‘사랑할 수밖에’를 불렀다.     



 “간지러웠어 널 보는 내 손이

 다 주고 싶었어 내 안에 남은 사랑까지

 지켜 주고 싶었어

 널 감싼 세상이 혹여나 너를 아프게 하진 않을까 하고…………     



 멀리서 바라만 봐도 마음이 아픈

 모질게도 끝없는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두 손을 꼭 쥘 뿐이야”     



 노래가 끝났는데 몇 분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있었다.  

    

 “다음 곡은 정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시겠습니다.”


 지아가 일어나 마이크를 정현우 변호사에게 넘겨주자, 그제서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꺄악!!!!! 은영 여신이닷!”      


 처음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      


 이 분위기를 어쩌지? 그대로 있다간 계속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아서 슬그머니 화장실로 향했다.    

  

 용무를 보려고 변기에 앉아있는데 가슴이 콩콩 뛰었다. 익숙했던 느낌. 살아있다는 느낌. 지아가 만끽해 왔던 찬란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게다가 부담감 없는 무대는 더욱 좋았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 없이 편하게 노래를 부른 것이 얼마 만인가.    

 

 순간 처음 노래를 배웠을 때가 떠올랐다. 순수한 열정으로 불렀고 완전히 노래를 즐겼던 때가…….  

    

 오랜만에 그 기분을 다시 맛보자 지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인생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물론 은영의 목소리는 지아와 비교할 수 없었지만, 음색이 독특해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연습을 조금만 하면 일반인치고는 꽤, 제법 노래를 잘 부를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서 중단해야지. 은영은 지아가 아니니까.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생각했다.      


 자제하자. 예전 버릇이 너무 많이 나오면 곤란해.      


 그렇게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술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민선혁과 마주쳤다.      


 “은영. 너 남자들 앞에서 꼬리 치는 건 여전하네. 아니, 오늘은 평소보다 더 심하던데. 많이 고팠나 봐.”     


 민선혁이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씰룩거리며 비아냥거렸다.      


 저 자식이 미쳤나. 어디서 개 짖는 소리를 하고 있지?      


 상대할 가치도 없어서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야. 내 말이 우스워?”     


 민선혁이 지아의 앞을 막아서더니 갑자기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너. 제정신이?”


 민선혁의 손을 뿌리치면서 지아가 말했다.      


 “나. 멀쩡한데.”

 “그럼 왜 이래?”

 “너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거슬려서 그런다.”

 “네가 왜 거슬려?”

 “넌 내 여자였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그 잘난 마누라한테 전화라도 해줄까?”

 “이게 왜 이렇게 당당해졌을까?  변호사님이 챙겨준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남자만 보면 그렇게 헤실거리고 아양이나 떨고……. 네가 매번 그런 식이니까 우리가 헤어진 거잖아.””


 민선혁의 말에 술이 확 깼다. 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지아가 지금껏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은영은 민선혁 말고는 교제한 이성이 없었다. 은영은 공부나 일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편이었으나 그밖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여행을 많이 다닌 것도 아니고 특별한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아가 보기엔 상당히 메마르고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민선혁의 괴변을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민선혁 때문에 은영이 그렇게 살았던 게 아닐까, 라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구속해서 상대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사람. 혹시 민선혁이 그런 부류에 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한 마당에 이 해괴망측한 행태까지 벌이다니. 어이없는 비난과 간섭.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야. 너 아직 나한테 미련 있어?”

 “미쳤냐. 너 같은 애한테 미련은…….”

 “그럼 나 들어가 봐야겠는데 좀 비켜줄래?”

 “안 되겠는데…….”     


 민선혁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지아를 쏘아보며 말했다.     


 때마침 화장실을 가려고 나온 여직원이 둘을 보고선 물었다.      


 “변호사님. 민변호사님. 여기서 뭐 하세요?”

 “아. 화장실 다녀오다 마주쳤요.”     


 지아는 얼른 여직원에게 길을 비켜주며 실내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민선혁이 자신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뱉어내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점원이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맥주를 테이블 위에 놓아주었다. 지아는 연거푸 두 병을 원샷으로 들이부었다. 그래도 기분이 풀리지 않아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     


 무대엔 여직원 둘이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노래방 기계의 반주에 맞춰 사이키가 반짝반짝 돌아가고 있었다. 몇몇은 넥타이를 이마에 두르고 어깨동무를 한 채 율동을 따라 하고 뒤늦게 합류한 직원들은 건배를 외치며 흥청거리고 있었다.     


 민선혁은 건너편에 앉아 석연찮은 표정으로 지아를 흘끔거리고, 민우는 맥주잔에 얼음물을 담아와서 여기저기 나르느라 경황이 없었다.      


 아. 이럴 땐 신나게 노는 게 남는 거겠지?      


 지아는 자신이 은영으로서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꼬리 치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 끈을 풀어 던지고 지아는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     


 민우는 식사 자리에서부터 언짢았다. 형이 갑자기 은영의 손을 잡질 않나, 앞 접시에 반찬을 놓아주질 않나.     


 자신이 초대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지나치게 친한 척하는 형이 못마땅했다.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길래 회식을 핑계로 맛난 걸 대접할까 했었다. 그런데 둘이 가까워 보이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민선혁과의 묘한 긴장감.     


 본능적으로 거북했다.      


 민선혁은 작년에 대표의 인맥으로 KNG에 입사한 신입이다. 나이는 저보다 많았지만 시험에 늦게 합격했다고 들었다. 대표는 민선혁의 장인이 국회의원이라며 특별히 잘 지도해 달라는 부탁까지 하며 형의 어쏘로 그를 배정했다.      


 민우는 공채를 거쳐 입사했고 회사 사람들이 불편할까 봐 여전히 형과의 관계를 비밀로 하고 있다. 형은 업계에서나 사내에서나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고 민우는 형과 무관하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 민우였기에 배경을 앞세운 민선혁이 처음부터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이가 어린 자신에게도 싹싹하고 늘 의욕이 넘쳐 보여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는데 오늘 함께한 자리에서의 이상기류가 민우에게 경고음을 보내왔다. 은영을 바라보는 눈빛. 참으로 불쾌했다.     


 2차로 가요주점에 가는 게 아니었다. 보통 1차만 하고 바로 귀가했던 은영이 오늘따라 과음, 그러니까 형이 주는 술을 족족 받아 마시더니 꽐라가 되었다.      


 집까지 모셔다 드리려고 했는데 웬일로 노래가 부르고 싶다고 했고 그 말에 신이 난 인간들이 일체 단결하여 2차를 외쳐댔다. 형이야 처음부터 대세를 거스를 생각이 없는 인간이고 민우는 걱정되는 마음을 숨기며 따라갔다.      


 그리고 목격한 놀라운 광경.

    

 김은영! 김은영! 불! 패! 신! 화! 김은영!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 분이었나. 민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래를 부르는 은영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물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에 제 몸도 함께 젖어 들어갈 것만 같았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술기운에 이러나 싶어 민우는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도 자꾸만 몸이 뜨거워졌다. 정신을 차리려고 왔다 갔다 부산하게 움직여봐도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두 곡만 부르고 그녀가 자리를 비웠고 대신 형이 마이크를 잡았다.  

    

 돼지 멱따는 소리에 금방 제정신이 돌아왔다. 형의 노래는 민우가 제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진정제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그녀.      


 갑자기 무대에 오른 그녀는 촉촉한 머리카락, 야릇한 눈, 귀엽고 깜찍한 몸짓, 매력적인 음색으로 Hype Boy를 불렀다.      


 아. 신이시여. 어찌하여 저를 시험에 들게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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