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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Apr 03. 2024

사춘기도 아니고

 다들 심신 상실에 다다를 정도로 술을 퍼마신 후에야 회식이 끝났다.    

  

 “정민우! 사수 챙겨.”


 만취한 형이 택시에 타며 민우에게 말했다.      


 “네. 정 변호사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민우는 차 문을 닫아주며 꾸벅 인사를 했다.     

 

 형은 알아서 들어갈 테고 이제 어쩐다……. 민우는 술집 입구 계단에 앉아있는 은영을 돌아봤다.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입사 이래 민우는 그녀의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은영은 술이 센 편이었고 일은 늦게까지 했지만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늘의 그녀는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은 물론, 예사롭지 않은 노래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의 섹시한 춤까지… 모두 생소한 모습이었다.      


 최근 들어 그녀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을까. 아니면 지나친 알코올이 그녀를 뒤흔들어놓았을까.  

   

 이유가 무엇이든 저대로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시계는 새벽 두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택시를 잡아주는 것으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민우는 은영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곤 지나가던 택시를 잡았다.     


 “변호사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     


 민우의 다그침에 은영이 눈을 떴다. 그러나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눈빛이었다.    

  

 먼저 뒷좌석에 그녀를 태우고 민우도 옆자리에 앉았다.      


 “변호사님. 댁이 어느 쪽이세요?”

 “노량쥐~인~”


 혀가 꼬인 채로 은영이 대답했다.      


 “기사님. 일단 노량진 쪽으로 가주세요.”     


 택시가 출발하고 곧 올림픽대로로 진입했다. 도로는 한산했다. 드문드문 승용차 몇 대만 옆을 지나칠 뿐이었다. 술 냄새가 날까 봐 창문을 조금 내렸다. 열린 틈으로 시원한 강바람이 들어와 취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균일한 간격으로 멀어지는 가로등을 따라 광란의 밤도 환상처럼 멀어져 갔다.      


 상쾌한 공기에 복잡했던 마음이 겨우 가벼워지려는데 갑자기 은영의 고개가 민우의 어깨 위로 기울어졌다.   

   

 순간 민우는 얼음이 되어버렸다. 때마침 차창 안을 힐끔거리던 밤송이 모양의 가로등 불빛이 민우와 은영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이 은빛으로 빛났다.      


 그녀가 숨을 내쉬며 작게 뭐라고 중얼거렸고 민우는 그녀의 목이 꺾이지 않도록 살짝 머리를 받쳐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녀의 머리를 만졌던 오른쪽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숨에서 라일락 향이 났다.      


 그때였다.      


 “욱욱”     

 은영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괜찮으세요?”

 “으으으 토할 것 같아.”


 은영의 상태를 보니 비상 상황이었다.      


 “기사님. 죄송합니다만 제일 가까운 출구 쪽으로 나가서 세워주세요.”


 민우의 요청에 기사는 짜증 난 목소리로 일침을 가했다.      


 “안에서 토하시면 안 됩니다.”


 택시는 총알처럼 빠르게 대로를 빠져나와 길가에 둘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쌩~하고 멀리 달아나 점처럼 작아지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변호사님. 괜찮으세요?”


 민우가 묻자마자 은영이 화단 쪽으로 몸을 숙였다.      


 “욱. 욱”


 저녁에 먹은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민우는 은영의 등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풀과 꽃에 몹쓸 짓을 하고 나서야 은영은 안정을 찾았다. 모든 것을 게워내고 속이 편해진 듯했다.     

 

 그런데 금방 괜찮아 보였던 그녀가 토끼 눈이 되어 어쩔 줄 몰라했다.      


 “어쩌지? 정변. 바짓단에 토사물이 묻었어.”

 “아. 저는 괜찮아요. 변호사님 속은 괜찮으세요?”

 “어. 어. 내 재킷에도 묻었어. 으아아 앙”     


 은영이 아이처럼 울먹울먹 했다.

     

 ***     


 호텔 객실엔 시원하게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은영은 화장실에서 재킷을 빨고 있었다. 땀범벅이 된 민우는 쭈뼛쭈뼛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안을 서성이다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세면대에서 나는 물소리가 자꾸만 이상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민우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지?     


 잠시 후 은영이 화장실 문을 열었다. 은영은 앞섶이 축축 젖은 재킷을 손에 들고서 민우 곁으로 다가왔다.      

 “정변도 씻어.”     


 은영의 목소리가 야릇하게 들렸다. 이런 아찔한 상황이라니.


 “아니. 전 괜찮아요.”


 은영이 옷걸이를 찾아 상의를 걸어놓고는 민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무릎이 바닥에 닿을 것 같은 자세를 하고선 그의 바짓단을 살폈다.      


 “이대론 안 되겠어. 어서 씻어.”

 “어. 어. 괜찮……은데… 요……??”     


 민우가 어버버 하는 사이 은영이 그 자세 그대로 앉아 블라우스의 윗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녀의 도발에 민우의 마음이 술렁거렸다.


 “벼… 벼노사… 님??”


 민우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은영의 쇄골 라인이 눈앞에 드러났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는데 은영은 그의 기분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다음 단추들을 풀어나갔다.      


 하얀 피부 결을 따라 가슴골과 가냘픈 어깨가 보였다.      


 쿵쿵쿵. 심장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누구의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진동. 쿵쿵 쿵쿵. 박자가 빨라졌다.      


 아. 이제 나도 모르겠다. 민우는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고개를 젖힌 은영의 속눈썹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민우…”


 은영이 민우를 부르며 뭐라 막 말하려 했다. 민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상체를 숙여 그녀의 작은 입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빨간 두 꽃잎이 포개어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었다.

     

 그녀에게서 라일락 향기가 났다.


***


 “쿵!”     


 심한 충격에 민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     


 또?     


 민우는 방바닥에 왼쪽 뺨을 붙이고 누워 있었다. 침대에서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어깨와 턱이 얼얼했다.      


 아이 씨! 이게 뭐야. 사춘기도 아니고.    

  

 욕이 나오려 했다.      


 그랬다. 민우는 석 달째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회식 이후 시작된 꿈이 매일 밤 민우를 괴롭혔다. 아침마다 맞이해야 하는 이 민망하고 허탈한 축축함이란.      


 민우는 방바닥에 딸려 내려온 이불을 발로 찼다.      


 도대체 왜 자꾸 이런 꿈을 꿀까. 그날 분명 은영이 토하고 나서 둘은 편의점에 들렀다. 생수와 물티슈를 사서 뒤처리를 마쳤고 은영이 극구 말리는 바람에 집까지 데려다주지도 못했다.  

    

 그녀는 토하면서 술이 다 깼다며 카**택시를 불러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 민우는 이상하게 텅 빈 기분이 들어 한 시간 넘게 새벽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뭣이 잘못되어 이상한 꿈에 시달리며 수면부족까지 겪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이놈의 꿈 때문에 민우는 회사에서 은영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괜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존경을 기반으로 한 애정이 불순하게 변한 것 같아 난감했다.      


 나이 차이야 네 살밖에 나지 않았지만 법조 경력으로는 대선배인 은영이었다. 아무리 꿈이라도 낯 뜨거운 일이었다.


***


 이명섭 씨 사건의 첫 변론기일이었다.


 “사건번호 2024가단5632 손해배상 사건 원고 대리인 법무법인 KNG의 김은영 변호사님, 정민우 변호사님 출석하셨네요.”

 “네”


 지아와 민우가 동시에 대답했다. 초면인 판사는 이미 은영과 민우를 알고 있었다.      


 “피고 대리인 법무법인 함께의 도석현 변호사님 출석하셨나요?”


 판사의 질문에 피고 소송대리인의 담당 변호사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네”     


 양측 대리인의 출석이 확인되고 첫 변론이 시작됐다.      


 “소송이 좀……. 일단 원고 대리인, 주장의 요지를 진술해 주시죠.”


 판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스크린에 소장을 띄우며 말했다.


 “피고들이 망인의 치료를 방해하는 바람에 망인이 일찍 사망하게 되었고 피고들이 원고와 망인에게 한 폭행과 협박으로 원고가 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바입니다.”

    

 민우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법정이 낯설어 몹시 긴장했던 지아는 민우의 대답에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피고는 원고의 주장이 허위라는 답변서를 제출했네요.”


 “네. 원고의 주장처럼 피고들이 치료를 방해하거나 폭행, 협박을 가한 적은 없습니다. 원고는 상속재산 분할에 대해 뒤늦게 불만을 품고서 돈을 더 받고자 이 소송을 제기한 것에 불과합니다. ”


 판사는 도석현 변호사의 말을 수긍한다는 표정을 짓고서 지아에게 물었다.   

   

 “제가 보기에도 좀 무리하게 소송을 제기한 감이 있는데 원고를 설득해서 소 취하를 고려해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실관계도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고 소 취하부터 언급하다니. 섣부른 예단에 화가 난 지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꼿꼿이 판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원고도 가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주저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원고는 망인이 고통스러워했던 모습을 여전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피고들로 인해 원고와 망인은 심각한 상처를 받았고 그 때문에 망인과의 마지막 순간이 아픔으로만 남았습니다. 피고들이 그렇게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아버지는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원고는 아버지와의 좋은 기억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원고는 아버지와의 소중한 시간을 망친 피고들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원고는 이 소송을 통해서라도 피고들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소 취하는 불가능한 상황임을 말씀드리며, 피고들의 위법행위를 밝힐 기회를 주시길 간곡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망인이 사망하기 전 기거했던 병원의 요양보호사를 증인으로 신청하여 요건사실을 입증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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