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변론기일. 증인신문이 있는 날이다.
지아의 부탁에 망설이면서도 출석하겠노라 약속했던 송선희는 그 후 연락이 안 되었다. 민우가 병원에 가보겠다며 오전에 사무실을 나섰다.
판사가 증인의 출석을 확인한다.
요양변호사 송선희는 끝끝내 나오지 않았고 이명섭 씨의 작은 아버지인 이기준만 출석했다. 그리하여 이기준에 대한 증인 신문 절차가 진행됐다.
이기준이 증인석에 섰다.
증인의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판사가 증인에게 말했다.
“선서 후 기억에 반하는 진술을 할 경우에는 위증죄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혹시 본인의 형사책임에 관한 내용이 있으면 증언거부권 행사할 수 있습니다. 오른손 들고 선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서,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증인, 이기준.”
증인의 선서가 끝나자 판사가 지아에게 말했다.
“원고 대리인, 주신문하시지요.”
지아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고 차분하게 신문을 시작했다.
“증인은 원고의 작은 아버지이며 망인의 친동생이지요?”
“예”
“망인이 살아계실 때 자주 왕래하는 사이였나요?”
“형이 아프기 전에는 명절에나 만났지요. 다들 사느라 바빴으니까요. 그러다 형이 투병 생활을 시작하고는 매주 한두 번 봤습니다. 병원에 갈 때 자주 동행했고 요양병원에 입원하고도 계속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증인은 망인이 새로운 치료제로 치료받았던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그때 형님이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이후 망인이 같은 치료제로 계속 치료받기를 원했다는 사정을 알고 계셨나요?”
“예.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거든요.”
“그런데도 치료를 중단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요?”
“형수와 명호의 반대가 심했어요.”
“어떤 식으로 반대했습니까?”
“형수는 제가 볼 때마다 형에게 고함지르고 욕을 했습니다. 계속 치료받으려거든 자신과 이혼하자고도 했지요. 명섭이한테는 형님 재산 노리고 옆에 붙어있는 거라며 쌍욕을 해댔지요.”
“증인은 피고들이 원고 이명섭 씨와 망인을 폭행한 사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네. 아마도 2022. 3. 중순쯤이었던 것 같아요. 병문안을 갔다가 사달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남사스러워서. 말하기도 부끄럽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목격하셨습니까?”
“제가 병실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안에서 형수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컵 같은 것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구요. 놀라서 들어가 보니 명호가 명섭이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었어요.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르렁거리면서요……. 그걸 말리던 형님을 형수가 잡아당기다가 형님이 넘어졌어요. 아마 그때 둘 다 제법 다쳤을 겁니다. 다들 가고 나서 형님에게 물어봤지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형님은 울먹이며 말하더군요. 나는 이제 아무런 힘이 없다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서 흐느꼈어요.”
주신문이 끝나고 반대신문이 이어졌다. 피고 대리인의 도석현 변호사가 증인에게 질문했다.
“증인은 오 년 전에 망인에게 빌리기로 한 사업자금 때문에 피고들과 다툼이 있었지요?”
“…… 네”
“당시 증인은 피고들이 문제 삼는 바람에 망인이 빌려주기로 했던 돈을 받지 못했지요?”
“네.”
도석현 변호사가 출력한 종이 한 장을 증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은 원고가 운영하는 회사의 법인 등기부 등본입니다. 그런데 한 달 전 증인이 이 회사의 공동이사로 등재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맞습니까?”
증인 이기준이 머뭇거리자 도석현 변호사가 재차 물었다.
“증인! 얼마 전 원고 회사에 이사로 취임했지요?”
“…… 네”
난감한 표정으로 증인이 답했다.
“증인은 이전부터 피고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감정이 나쁜 데다가 원고의 회사에 이사로 취임하게 된 사정까지 겹쳐서 원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니 이~ 양반이!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요?”
증인이 벌떡 일어나 도석현 변호사에게 삿대질까지 해대며 화를 냈다.
“증인 진정하시지요. 피고 대리인도 쟁점과 관계없는 질문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판사가 제지했다.
증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랐다.
“재판장님, 원고가 경영하는 회사의 법인등기부 등본을 참고자료로 제출합니다.”
도석현 변호사가 의기양양하게 참여관에게 다가가 서류를 제출했다. 증인이 원고와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는 사정을 밝히는 것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표정이었다.
증인은 매우 불안해 보였다. 심정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도석현 변호사는 증인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증인을 도발했다.
폭행을 목격했다면 당시에 왜 병원 관계자나 경찰을 부르지 않았냐? 피고 이명호가 어느 쪽 손으로 멱살을 잡았냐? 망인은 어느 방향으로 넘어졌나?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느냐? 다쳤다면 치료 내역이 있을 텐데 왜 없냐 등 시시콜콜 따져 물었다. 발끈한 증인은 도석현 변호사의 의도대로 이래저래 휘말리다 신문이 끝났다.
“증인 수고하셨습니다.”
판사가 증인 이기준을 돌려보내고 증인 송선희에 대한 신문을 위해 다음 재판 날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지아는 이기준의 증언이 원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변호사 수첩을 펼쳤다. 그 찰나에 민우가 헐레벌떡 법정 안으로 들어왔다. 가쁜 숨을 가누며 지아에게 다가와 망인의 일기장 두 권을 건넸다.
지아는 휘리릭 일기장을 넘겨보고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재판장님. 송선희에 대한 증인 신청을 철회합니다. 대신 망인의 일기장을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
피고 대리인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일주일 뒤였다.
-김은영 변호사님, 저 도석현입니다. 이명섭 씨 사건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통화 가능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지금 통화 가능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피고들이 합의를 원하고 있어서 그러는데요. 원고는 조정할 의사가 있을까요?
“네. 그럼요. 조정할 의사야 있지요. 다만 어떤 조건이냐가 문제겠지요?”
-망인의 일기장에 원고 주장과 일치하는 내용이 다수 적혀있는 바람에 피고들이 합의를 원하긴 하지만요. 사실 변호사님도 아시잖아요. 이 정도 사건으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얼마 안 된다는 거요. 그래서 말인데, 관련해서 향후 일체의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조건으로 칠천만 원 정도 어떨까요? 원고에게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 어떠세요?
“의뢰인과 상의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휴우! 지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첫 사건을 해결했다. 뭔가 모르게 뿌듯했다.
이 정도면 의뢰인의 마음이 좀 풀릴 것이고 은영도…… 괜찮겠지? 달달달 떨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일을 잘해나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기분이 좋아 등받이에 푸욱 기대고 앉아 의자를 돌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낯설었던 공간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한참을 그렇게 놀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다시 업무 모드로 돌아왔다.
“네. 들어오세요.”
차분하게 지아가 대답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민우였다.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반가웠던 것이다.
민우가 은영의 방을 찾아온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회식 이후 계속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신경 쓰고 있던 차였다.
그날 못 볼 꼴을 보여서 그런가 싶어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민우가 먼저 슬슬 피하는 것 같아 멋쩍다 못해 살짝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일을 함께하는 마당에 사사로이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여하튼 민우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하자 서운함보다 반가움이 앞섰다. 하지만 절로 눈이 반짝거리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이유가 그가 찾아와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이번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가져왔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했다.
“아. 정변. 왔어요?”
“네. 변호사님. 식사는 하셨어요?”
민우가 환하게 물었다.
거북해서 거리를 뒀었나, 했던 걱정은 기우일지도……. 지아의 꽁했던 마음도 환하게 풀렸다.
“그럼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커피 한 잔 줄까요?”
“네. 감사합니다.”
지아는 얼마 전에 사들인 핸드드립 세트를 꺼내놓고 원두를 갈았다. 고소한 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전기주전자에서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막 쌀쌀해지기 시작한 날씨에 온기를 더해주는 것 같았다.
“핸드드립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방금 내린 커피를 머그잔에 따르고 민우에게 건넸다.
“부드럽고 향이 참 좋네요.”
그가 미소 짓는다. 백만 불짜리 미소.
나는 네 목소리가 더 부드럽단다.
“변호사님은 안 드세요?”
민우가 물었다.
지아는 처음 민우를 만났을 때처럼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 마셔야죠. 입에 맞다니 다행이네요.”
이~ 주책. 나 미쳤나 봐. 얼굴만 봐도 황홀해지는 이 기분, 뭐지?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마주 앉아있으니 지아의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민우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곤 말했다.
“벌써 가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