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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Apr 24. 2024

살도 뺄 겸 우리 함께 운동이나 시작할까?

 “참. 좀 전에 명섭 씨 사건 피고 측에서 합의하자고 전화가 왔어요. 정변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네요. 고마워요. ”

 “변호사님은… 제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변호사님이 송선희 씨를 몇 번이나 만나고 신경 쓰셔 놓고선.”   

  

 칭찬을 받는 것이 어색했는지 민우가 쑥스러워했다.      


 “겸손한 건 좋지만 정변의 공이 제일 컸던 게 사실이죠. 일기장이 없었다면 피고 측에서 먼저 연락 올 가능성은 없었을 거예요.”

 “송선희 씨가 망인의 일기장을 가지고 계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러모로 마음이 무거웠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정을 다 아는데 증인으로 나설 용기는 없고… 가족보다 자신에게 더 의지했던 망인이 계속 눈에 밟히고. 섬뜩하리만치 솔직한 속내를 전해 받아서 부담스러웠다고 해요. 한편으론 너무 슬퍼서 일기장을 계속 보관하고 있었다고… ”     


 “그랬겠죠. 지켜보는 입장에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자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는 사람을 대하는 것, 그것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상당히 어려웠을 테죠.”     


 시험 발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피고 측은 어떤 조건으로 조정을 원하고 있나요?”


 “아. 부제소 합의를 전제로 7천을 제시하더라고요.”

 “그렇게 많이요?”     

 민우의 눈이 똥그래졌다.      


 “우리가 좀 과하게 청구하긴 했지만, 그만큼 제안할 줄은 몰랐습니다.”

 민우의 목소리에 의외라는 감정이 실려있었다.     


 “우리 쪽에서 노인복지법 위반으로 문제 삼을까 봐 지레 겁먹은 것 같아요.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형량도 꽤 높고요. 돈 있는 사람들이니 이렇게라도 빨리 해결하고 싶은 거겠죠.”

 지아는 머리에서 막 떠오르는 대로 대답하며 민우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하긴 피고들이 망인과 원고에게, 좀… 심하긴 했죠. 일기장을 받기 전까진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처음 의뢰인을 봤을 때 썩 믿음이 가진 않았거든요. 일반적인 재산 싸움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저도 처음엔 그랬는데 명섭 씨와 몇 차례 이야기하다 보니 사정을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변호사님이 늘 하셨던 말씀처럼 송사는 꼭 생명체 같네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민우와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지아는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어버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찾아왔던 쇼크. 정신없이 흘러갔던 장례 절차. 부모를 탓할 수 없는데도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시달렸던 기억.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불면의 밤들.      


 지아는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과 죄의식 사이에서 방황했다.      


 여행을 말렸더라면? 자신도 함께 갔더라면? 평소에 좀 더 사랑을 표현했더라면?      


 의미 없는 가정들로 자신을 괴롭혔다.      


 한동안 지아는 가족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던 사람들을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가족의 죽음을 준비할 최소한의 시간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명섭 씨의 가족들은 그런 행운을 스스로 날려버렸다.     


“저는 죽음이 임박한 사람 앞에서 자신들의 욕심부터 챙겼던 피고들이 조금 안타깝네요. 남의 가족사를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요. 사정이 어떻든 망인이 가장 약한 순간 그를 둘러싼 자들의 행위치곤, 반칙 아닌가 싶네요.”     


 사건은 해결됐지만, 망인의 세상이 슬프게 막을 내렸다는 생각에 지아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내선으로 박 차장(은영의 담당 직원으로 언제나 칼 정장을 하고 다니는 여인)이 건 전화였다.      


 “네. 차장님.”

 -변호사님. 이명섭 씨가 오셨는데 혹시 지금 면담이 가능할까요?

 “그럼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     


 명섭 씨는 꽤 초췌한 모습이었다. 처음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는 분노로 활활 타올라 오히려 기운 넘쳐 보였던 사람이 그사이 많이 늙은 것 같았다. 송사는 어떤 식으로 건 당사자를 피폐하게 한다.  

    

 “변호사님예~~ 작은 아부지가 화가 많이 났던데요. 소송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려하는 목소리로 명섭 씨가 물었다.      


 “지금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좀 전에 피고 변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합의하자고 하더군요.”     


 지아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명섭 씨의 안색이 바뀌었다. 기대에 찬 눈초리였다.     


 “아. 그래요?”

 “네. 합의금으로 7천 제안하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합의해도 될까요?”

 “네. 나쁘지 않은 조건입니다.”     


 명섭 씨가 잠시 망설였다.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지아가 추가로 설명했다.      


 “어머니 재산을 형에게 모조리 넘긴 것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추후 방법이 있습니다. 유류분 반환 청구라는 제도가 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형을 상대로 명섭 씨의 법정상속분의 절반을 돌려받을 수 있는 제도지요.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요.”     


***     


 주말 저녁 집에서 치킨을 뜯어먹던 중 수민이 투덜거렸다.      


 “나. 살이 너무 쪘어. 이대론 안 되겠어. 나의 예쁜 옷들을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어.”     


  그러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래도 치맥을 하면서 뱉어낼 말은 아니었다.      


 “수민. 지금 너의 오른손엔 치느님이, 왼손엔 맥주가 들려있다. 우리의 불금을 화려하게 장식해 줄 음식 앞에서 예를 갖추진 못할망정, 살 타령은 너무하지 않니?”     


 지아가 현실을 직시하라며 톡 쏘아붙였다. 그런데 수민의 반응이 이상하다. 평소처럼 받아치지 않고 “그지?”하며 바로 수긍한다.     


 몰티즈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저 애잔한 눈빛은 또 왜?     


 지아가 수민과 함께 살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수민이 개 거품을 물때보다 순한 몰티즈로 변할 때가 더 위험하다는 것. 수민이 초롱초롱 애절하게 쳐다보면 뭔가 불길하다. 혹시나 그놈의 오지랖 병이 재발했을까 봐 지아는 종종 긴장했다.      


 “날씨는 쌀쌀해지는데, 옆구리는 시리고… 독서보단 연애가 고픈 계절이다.”

 “그래서? 이번엔 또 누구야?”     


 안타깝게 수민은 짝사랑 대마왕이었다. 지금까지 지아가 아는 대상만 해도 벌써 세 명이다.     

 

 사무실 건물 1층에 새로 생긴 김밥집의 알바생을 시작으로, 아내의 외도로 상처받은 이혼 소송의 의뢰인, 얼마 전 입사해 실수투성이 어리바리한 신입까지. 이성에 대한 취향도 다양해서 나이 외모 직업을 가리지 않았다.      


 수민은 뭔가 짠~함을 느끼면 바로 사랑에 빠진다. 수민에게 구원환상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좀 신기한 점은 혼자 좋아서 몰래몰래 챙겨주다가 또 금방 식어버린다.  

    

 그래서 지아는 수민이 단순한 금사빠일 거라 추측하고 있다. 두루두루 실속 없다는 측면에서는 일가견이 있는 수민이었다.      


 “쑥맥. 내가 아니고 너. 너 말이야. 이제 다시 연애를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수민이 뜬금없이 지아를 겨냥했다.      


 이야기가 왜, 또, 그렇게 흘러가냐고? 왜? 왜? 내 연애사냐고?     


 “갑자기 뭔 헛소리야? 네 옆구리가 시린데 왜 내 연애가 거론돼?”

 “너~~~ 요즘 수상해.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수민이 슬쩍 흘겨보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뭐? 뭐?”

 지아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너 최근 들어 엄청 예뻐진 거 알아? 이 생기 있는 얼굴을 보라. 살도 자꾸 빠지고 말이야.”

 하면서 수민은 손가락으로 지아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에이~~ 뭔 소리?”

 “아냐 아냐. 너 진짜로 달라졌어. 너 혹시…?? 정 변호사님 좋아하냐?”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내가 후배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지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크게 흔들며 정색했다.      


 “엥? 민우? 난 정현우 변호사님 말했는데?”


 수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지아를 쳐다봤다.      


 헉. 이게 아닌데…….     


 “수민아. 다이어트 겸 우리 같이 운동이나 시작할까? 필라테스? 요가?”

 “우아아아! 네가 웬일? 나는 발레가 하고 싶다. 발레. 백조처럼 우아한 여인이 되고 싶다.”    

 

 지아는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수민은 함께 운동하자는 말에 낚여 좀 전의 대화를 홀라당 잊어버린 듯했다.     


 새벽까지 퍼마셔도 조깅을 빠뜨리지 않는 수민에게 지아의 제안은 분명 유혹적이었다.      


 수민은 금세 앞으로 만들어갈 보디라인에 몰두했다. 어쩜 저렇게 단순하고 순진한지… 엉뚱하다 못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아름다워지려면 자신에게 투자하라잖아. 은영. 우리 나이에 귀엽기는 글러 먹었으니 우아함에 도전해 보자. 우아~~ 하게!”


 양팔을 옆으로 길게 뻗으며 수민이 말했다. 코끝을 살짝 높여 시선을 내리깔고, 척추를 곧게 세웠다.      


 “그래 그래. 우아~~ 하게 발레를 하자.”

 “꺄아악!! 은영. 최고야.”     

 수민은 아이처럼 발을 구르며 지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 이~ 몰티즈. 어쩌지?      


 지아는 아직 은영에게 안길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발레라~~      


 아름다움이라~~      


 지아에겐 많은 의미를 던지는 단어였다. 순간 그녀가 떠올랐다.     


 “참. 너. 혹시 강혜순 씨 봤어?”

 지아가 물었다.


 “아. 그 부당이득 사건의 의뢰인 말이지? 너 말 잘했다. 그분 엄청난 미인이던데. 모델이 따로 없더라고. 플랫슈즈를 신었는데도 175는 되어 보이더라. 살랑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사무실에 들어오는데 직원들의 시선이 다 그분에게 쏠리더라고.


팔다리가 학처럼 늘씬하고 얼굴은 또 얼마나 탱탱한지. 연예인급 외모던 걸. 아마 그분도 발레를 했을 거야.”     


 이미 발레에 꽂혀버린 수민이다. 모든 이야기의 흐름은 발레로 귀결될 예정이었다.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나 깜짝 놀랐잖아. 오십 대인데 군살 하나도 없고 쭉쭉 빵빵. 그렇게 예쁜 분을 의뢰인으로 만날 줄이야.”

 “오십 대였어? 야. 대박! 난 우리 또래인 줄 알았어. 그런데… 그분은 왜 피고가 된 거야?”     


 몰티즈의 동그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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