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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y 08. 2024

불편한 사람

 지아가 수민과 함께 회사 구내식당으로 들어서다 식판을 들고 줄을 선 정현우 변호사와 마주쳤다. 그 뒤에 정민우, 민선혁도 있었다.      


 “아유. 김 변호사님 오셨어요?”


 정현우 변호사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자리를 피할까 했는데 영락없이 민선혁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정현우 변호사님. 바로 옆방인데도 뵙기가 힘드네요.”

 “그렇지요? 아, 참. 이번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당분간 정변 없이 바쁘실 텐데, 면목이 없네요.”

 민망한 표정으로 정현우 변호사가 양해를 구했다.      


 “아닙니다. 대표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재건축 사건 때문에 TF팀이 구성된 건데요. 변호사님께서 마음 쓰실 상황은 아니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사건 해결하고 돌려보내겠습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건수가 많고 법리도 복잡하다고 들었습니다. 신경 쓸 일이 많으실 텐데요.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지아는 정현우 변호사와 주거니 받거니 담소를 나누다 음식을 받아 들고 나란히 앉았다. 수민, 민우, 민선혁도 자연스레 한 테이블에 모였다.      


 하필 맞은편에 민선혁이 앉을 게 뭐람? 한동안 마주치지 않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회식 날의 불쾌한 기분이 되살아났다.    

 

 입맛이 떨어져 깨작거리고 있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민우가 말했다.     

 “오늘 잡채가 참 맛있네요.”

 “그러네요. 훌륭한데요.”     


 수민이 맞장구쳤다. 미식가인 수민의 입에도 맞다는 잡채를 지아는 그저 몇 가닥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때 민선혁이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학 때 먹던 학식만큼 가성비가 좋습니다. 김은영 변호사님은 왕만두를 참 좋아했지요.”


 저 자식이? 뜬금없이 왜?      


 “아 맞아요. 김은영 변호사님과 민선혁 변호사가 한 학번 이랬지요?”


 정현우 변호사의 물음에 민선혁은 수민에게도 눈을 맞추며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네. 이수민 변호사도 동기였습니다.”

 “아. 모두 동기였군요. 학교 다닐 때 서로 잘 아는 사이였겠네요.”     


 저 인간은 무슨 의도로 은영과 수민까지 끌어들이며 친분을 과시할까. 불쾌한 기분이 더 나빠졌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쳤다. 지아는 수민과 따로 산책을 하겠다고 말하고 그들과는 헤어졌다.      


 건물 밖 화단을 지나며 수민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하소연했다.  

   

 “선혁이 저 자식은 눈치도 없이 왜 저래? 혼자만 동문이 아닌 정변이 얼마나 불편했겠어? 아휴. 저 놈과 앞으로도 계속 마주쳐야 하다니. 저 인간 하나 때문에 회사를 때려치울 수도 없고 참, 기가 막힌다.”

 “수민아.”


 지아가 수민을 불렀다. 진지한 목소리에 수민이 다소 긴장했다.      


 “왜? 은영? 많이 언짢았어?”

 “아. 그게 아니라 나 정말 왕만두를 좋아했어?”     


 “뭐래? 만두 귀신이. 너 만두 먹을 때마다 내 거 하나씩 뺏어 먹었잖아. 기억 안 나?”  

   

 수민의 말에 지아는 학교 식당에서 왕만두를 먹고 있는 은영의 모습을 생각했다.   

   

 하나 더 찾았다. 자신과 은영의 공통점.      


 은영은 음악을 사랑했고 왕만두를 많이 좋아했던 것이다. 지아처럼.     


***     


 아침에 박 차장이 조정기일 통지서를 가져다주었다. 혜순 씨 사건의 답변서 부본이 원고 측에 도달하자마자 법원에서 조정회부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겨우 법정에 익숙해지려나 했는데 조정센터로 출석하라는 통지서를 받고 지아는 심란했다.     

 

 하아. 민우도 없이. 혼자 가야 하는구나.     


 이런, 쫄따구가 없어서 두려워하는 사수라니.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새 민우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혼자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혜순 씨에 대한 불편한 감정도 한몫하고 있었다.      


 지아는 솔직히 혜순 씨 앞에서 이성적이기가 어려웠다. 혜순 씨를 생각하면 사춘기를 불안으로 몰고 갔던 엄마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의뢰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법리를 찾아내고 유리한 주장을 하는 것이 변호사의 과제이자 의무인데 자꾸만 복잡한 심정이 되었던 것이다.     

 

***     


 조정 당일이었다.     


 원고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며 혜순 씨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지아는 조정이 성립되지 않아도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말라며 혜순 씨를 안심시켰다. 재판으로 가더라도 불리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지아는 초짜로 보이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뒀다. 조정절차를 공부했고 법원 민원실에 전화해서 미리 조정센터의 위치도 알아뒀다.      


 지아는 혜순 씨를 진정시키며 함께 걸어서 법원으로 갔다.      


 출입구를 통과해 조정센터가 있다는 쪽으로 향하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또각또각 두 사람의 구두 소리만 복도에 울려 퍼졌다.      


 마치 통제구역에 뭣도 모르고 무단침입해 버린 느낌이었다. 조정실 앞에 다다르자 법원 공무원이 다가와 사건 번호를 확인하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지아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3시 20분. 아직 십 분이 남아 있었다.   

  

 대기 공간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막 원고와 원고의 소송대리인도 도착했다.   

   

 초조한 당사자들의 마음과 달리 절차는 엄격했다. 정확하게 3시 30분에 조정실 문이 열렸다.    

  

 조정실엔 기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고 중앙에 상임조정위원이 앉아있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 원고와 피고의 좌석이 있었다. 원고와 원고의 대리인, 혜순 씨와 지아가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상임조정위원이 소송 서류를 뒤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원고는 이 사건 부동산을 매수하는 과정에서 명의신탁약정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군요. 하지만 원고와 피고의 약정을 매도인이 몰랐기 때문에 피고가 완전히 소유권을 취득했다는 이야기네요. 그런데 명의신탁 약정이 부동산실명법상 무효에 해당하니 대법원 판례에 따라 피고가 법률상 원인 없이 원고로부터 부동산 매수자금의 이득을 취했다는 취지네요. 원고는 피고에게 이를 반환해 달라는 청구를 하고 있군요. 맞습니까?”    

 

 “네.”     

 원고 대리인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답변서를 읽어보니 피고는 원고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네요. 흠~~~ 원고가 피고에게 부동산 매수자금을 증여한 것이지 명의신탁을 따로 약정한 적은 없었다는 주장이군요. 게다가 내연관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원고가 피고에게 금전을 지급했으니 민법 제746조에 따라 반환청구를 할 수 없다는 불법원인급여를 주장하고 있네요.”     


 조정위원이 미간을 좁히며 피고 주장의 요지도 확인했다.      


 “네. 얼마 전 원고의 배우자가 피고에게 협박성 문자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원고와의 관계를 청산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이후 원고가 피고와의 연락을 끊고 이 사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전반적인 사정으로 보아 원고가 외도를 용서받고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명의신탁을 주장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아가 부가적으로 설명했다.      


 이때 혜순 씨가 난데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각또각.      

 뾰족한 구두 굽이 조정실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원고에게 다가가 갑자기 그의 뺨을 후려갈겼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가 경악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피고! 피고 대리인과 함께 잠시 조정실에서 나가주세요.”


 조정위원이 소리쳤다.      


***     


 조정실 밖.      


 혜순 씨가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원고의 뺨을 때리는 행위는 범죄행위입니다. 게다가 법원 안에서, 조정위원 앞에서 폭행이라니요.’      


 혀끝에 맴도는 말을 집어삼키느라 지아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조정실 안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고성이 오고 갔다.      


 하아~~~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조정실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원고 대리인이 지아에게 말했다.      


 아~~ 무슨 말을 들을지 덜컥 겁부터 났다.      


 조정위원 앞에서 폭행이라니.      


 상임조정위원은 민사조정법에 의해 조정담당 판사와 동일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런 상임조정위원에게 잘 보이지는 못할망정 밉보이는 짓이라니.     


 의뢰인의 잘못을 눈앞에서 막지 못한 변호사의 심정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을까.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은영이었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애초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혜순 씨에게 귀띔이라도 했을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울고 있는 혜순 씨를 달래 조정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원고가 소를 취하하겠다고 합니다. 피고 동의하십니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조정위원은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사무적으로 피고에게 물었다. 혜순 씨가 놀란 표정으로 지아를 쳐다봤다.      


 “상대방이 소송을 없던 것으로 하겠다는데, 동의하시냐고 물으시네요.”


 지아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제야 혜순 씨는 상황을 이해하고 대답했다.

 “네. 동의합니다.”     


 이게 무슨?     


 이렇게 쉽게 취하할 거면서 왜 소송까지 제기한 거지?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혜순 씨와 조정실을 나왔다. 또각또각. 두 사람의 구두가 긴 복도를 거슬러 법원 밖으로 향했다. 정문을 지날 즈음 어디선가 애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혜순아.”     

 혜순 씨가 멈춰 섰다. 지아도 멈춰서 돌아봤다.      


 “혜순아. 오빠가 미안해. 용서해 줘.”     


 먼저 나갔던 원고가 혼자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혜순 씨에게 다가왔다. 원고 소송대리인과는 좀 전에 헤어진 모양이었다.      


 혜순 씨의 손찌검이 떠올라 혹시나, 하고 염려되는 마음에 지아가 막아섰다.    

  

 그때 혜순 씨가 지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괜찮아요. 변호사님. 둘이서 이야기 나눌게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사를 하고선 원고 곁으로 총총총 걸어가 버렸다.     


 지아는 터벅터벅 혼자 사무실로 돌아왔다. 잠시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남자는 왜 기다렸을까. 둘이서 무슨 대화를 나눌까.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궁금해했다. 앞으로 둘 사이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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