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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y 15. 2024

관계의 질

 지아는 창가를 떠나지 못하고 서리풀 공원의 단풍과 가로수의 바랜 잎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지아의 대답에 수민이 “김변호사님~” 하며 문을 빼꼼히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퇴근할까?”

 지아가 말했다.      


 “아니. 너 먼저 가. 난 아직 서류 쓸 게 잔뜩 남았어.”

 어쩐 일인지 수민이 뾰로통하게 답했다.   

   

 “그래? 좀 도와줄까?”

 “아니~~ 그게 아니고~~”

 “왜? 뭔 일 있어?”

 우물쭈물하는 수민의 태도에 지아가 염려돼서 물었다.

    

 “별건 아니고… 너 조정 간 사이에 공지 사항이 있었는데…”

 “그런데?”     


 “이번 주말에 가을 산행한다네.”

 “웬 산행이래?”


 “단합 대회잖아. 입사 이래 봄가을로 산에 끌려다녔는데 또 산이라니. 왜 산을 좋아하는 변호사님들만 우리 로펌에 모여있냐고.”

 “……”     


 연기 연습 때문에 수학여행도 참여해 본 적이 없는 지아였다. 단체로 산행할 기회가 없었음은 당연했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왜? 등산이 싫어?”

 “아니 아니~~ 이번 토욜 학원에 가보려고 했거든. 히잉~ 너 벌써 약속 잊은 거 아니지?”


 에휴. 이 몰티즈를 어쩌나. 표정이 심각해서 뭔 큰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지아는 빙그레 웃으며 책상 아래에 숨겨뒀던 택배 상자를 꺼냈다.


 “짜잔. 널 위해 준비했어.”     


 지아가 건넨 상자를 집어 든 수민이 금방 생기발랄로 돌아왔다.   

   

 “우와. 은영. 언제 발레복을 산 거야?”

 “당신이 잠든 사이에. 후후”

 “한 시간만 기다려줘. 나 금방 끝내고 올게. 얼른 집에 가서 입어봐야지.”   

  

 수민은 지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    

 

 수민이 민트색 레오타드에 꽃무늬 수가 놓인 흰색 스커트를 입고 거실로 나왔다.      

 “어때? 좀 어색하지 않아?”


 평소 수민답지 않게 쑥스러워한다.      


 그럴 만도 하지. 인류가 생산한 의류 중에서 몸의 단점을 하나도 커버해주지 않는 옷을 꼽으라면, 단연코 레오타드가 일 순위였다.     


 지아는 수민에게 다가가 골반과 겨드랑이 쪽의 천을 당겨서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그리고 스커트를 끈을 풀었다가 다시 묶어주었다.      


 “아. 이러니까 훨 낫네”

 수민이 거실 창에 자신의 라인을 비춰보며 좋아했다.   

   

 “발레 할 때는 머리를 이렇게 정수리 쪽으로 묶는 게 편할 것 같아.”

 지아가 수민을 소파에 앉혀놓고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똥 머리를 만들어주었다.  

    

 “은영.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너 안 하던 쇼핑을 하질 않나. 내 옷을 만져주질 않나. 심지어 머리까지 묶어주다니.”     


 갑자기 수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런, 어쩔~ 몰티즈는 감성이 너무 풍부해서 문제였다. 지아는 뜨끔한 심정을 숨기고 시치미 떼면서 말했다.   

   

 “네가 하도 발레, 발레 하니까 그런 거잖아. 이 언니에게 감동한 건 알겠는데 헛소리 그만하고 뚝 그쳐. 네가 사준 가방이 넘 예뻐서 보답하는 거야.”     


 지아는 탁자에 놓인 휴지를 뽑아서 수민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고마워. 은영~ 사랑해.”

 수민이 지아를 꼭 껴안았다.      


***     


 은영의 침대에 누워서 지아는 생각했다.      


 사랑.     


 사랑이라~~     


 은영의 세계에 들어온 이후 지아는 종종 은영이 부러웠다.      


 수민과 같은 단짝 친구를 둔 은영. 상태는 좀 안 좋은 것 같지만 그래도 칠 년이나 사귀었다는 남친이 있었던 은영.      


 은영은 로펌 대표와 정현우 변호사, 박 차장, 심지어 건물 관리인과도 사이가 좋았다.    

  

 아파트 단지 내 돌아다니는 길냥이조차 꼬리를 치켜들고 다가와 부비부비했다. 인수(人獸) 공통으로 은영은 사랑받았던 것이다. 동물을 꺼리던 지아가 산책할 때마다 냥이 캔 몇 개를 챙겨서 나오게 된 것은 순전히 그런 은영 때문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관계였다.      


 지아는 친밀한 관계가 힘들었다. 가까워지는 과정이 어려웠고 어떤 포지션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몰랐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아 왔으나 정작 자신은 사랑하는 걸 두려워했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땐 괜찮았다.      


 오히려 무척 좋았다. 천부적인 재능이라며 쏟아지는 찬사. 팬들이 보내준 편지와 선물. 매스컴을 통해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배역 선정에서 매번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던 지아는 무진장 부풀어 오르는 봄꽃처럼 매력을 발산했다. 들떠서, 성공에 취해서 보낸 날들이 많았다.      


 그러나 점차 대중의 관심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무시할 수 없는 악플, 부모님의 사고 후 공개된 사생활과 동정 여론. 인지도가 높은 만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      


 어느 순간 지아는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엷은 장막이 드리워져 일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고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할까, 사람들을 실망시킬까 봐 두려워했다.

     

 자꾸만 공허하고 외로웠다. 사랑을 갈망하면서 무서워했다. 지아는 열망과 거절의 무한궤도에 올라타 삐걱거렸다. 가까운 관계에서 그 증상은 더 심해졌고 이성적 만남의 경우는…… 그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지아는 천장에 드문드문 눈에 띄는 별 모양 스티커를 응시했다. 아마도 수민이 은영을 위해 붙여 주었을 것이다.     


 별을 보고 있자니 끝없이 우주공간을 헤매는 것만 같았던, 공허감에 지쳐가던 시절이 떠올랐다.   

   

 눈길만 보내도 남자들은 딸려왔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졌다. 많은 이를 사귀었지만, 피상적인 만남이 반복되었다.      


 당시의 지아는 강가에 앉아 돌멩이 하나 던지거나 손가락 끝에 물을 적셔 보는 행위로 강을 다 맛본 것처럼 굴었다. 신발 벗고 물에 들어가 발목을 담가보는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악순환이 이어졌다. 지아는 자주 허기졌고 접촉에 대한 갈증을 채우려는 사람처럼 사랑을 나눴다. 몇 개월 못 가 만남을 끝내고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석 달을 넘긴 관계가 없었다. 누군가는 감정을 싹 틔울만한 시기에 이미 지아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아의 마음은 상대방의 단점을 키우고 과장하는데 익숙했다.    

  

 너무 짧게 사귄 나머지 헤어지면서 남친들의 비난도 받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아는 문제점을 인식하거나 제대로 원인을 찾아보기도 전에 다시 같은 패턴을 따랐다.     


 갈수록 외롭고 피폐해지는 영혼이었다.      


 전등을 끄고 난 후에도 스티커가 형광색으로 빛났다. 별 사이로 언뜻 민우의 눈동자가 스쳐 지나갔다.      


 “사건을 함께 처리하지 않으니 마주칠 일이 거의 없네. 밥이라도 사준다는 핑계를 대면서 따로 한번 볼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이내 도리질 쳤다.     


 이젠 설지아가 아니니까.      


 신중해야 했다. 은영의 관계를 지아 때처럼 망칠 순 없었다.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며 지아는 태양계를 벗어나 머나먼 별을 찾아 우주를 떠도는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     


 사내 전화가 울렸다. 박 차장이 건 전화였다.     


 “김변호사님.”

 “네. 박 차장님. 말씀하세요.”     


 “강혜순 씨 사건의 원고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면담을 요청하는데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도대체 왜?      


 일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초짜인 지아도 알 수 있었다. 소송의 상대방이 반대쪽 변호사를 만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라는 사실을.     


 게다가 상대방 당사자에게 변호사가 있는 경우에는 그 변호사의 동의나 다른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한 변호사는 상대방 당사자와 직접 접촉해서는 안 된다.     

 

 “아, 네… 네.”     


 지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취하로 이미 소송이 종료되었기에 별 무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혹시나 혜순 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박 차장이 원고였던 길제범 씨와 함께 은영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변호사님.”

 “네. 안녕하세요. 길제범 씨 맞으시죠? 이리로 앉으세요. 소송이 끝났는데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궁금하네요.”     


 지아는 태연한 척 그를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네. 변호사님. 제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변호사님께 사건을 의뢰하고 싶어서입니다.”

 “글쎄요. 혜순 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상황에 따라 수임 제한 사유가 있을 수 있어서 제가 사건을 맡긴 곤란합니다. 다른 로펌을 찾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 아닙니다. 혜순이랑은 전혀 무관합니다. 제가 소유하고 있는 건물의 주차장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필 왜 절 찾아오셨는지 저로선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네, 저도 변호사님이 불편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변호사님을 찾아온 것은 사건을 믿고 맡길 만한 곳이 없어서입니다.”     


 황당했다. 원고가 피고 측 대리인을 신뢰한다며 사건을 의뢰하고 싶다니 너무 이상했다.      


 “제가 사업체를 운영하다 보니 자잘한 송사를 많이 경험해 왔거든요. 다양한 변호사를 만나 봤지만 이제껏 김은영 변호사님처럼 열심히 하시는 분을 못 봤습니다.”


 “아.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첫 기일도 진행하지 않은 사건이었는데요?”     


 지아는 의아할 뿐이다.      


 “답변서 때문입니다. 변호사님이 제출했던 거요.”

 “아, 네…”     


 “혜순이가 저를 믿고 그동안 노력했던 사안에 대해 하나하나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적어주셨잖아요. 그리고 저의 변심은 어쩔 수 없지만, 그 변심을 판결로 지지할 수는 없다며 청구 기각을 구한 부분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대답이람?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쓴 서류가 마음에 들었다니 어이가 없었다. 순간 지아는 궁금했던 사정을 길제범 씨에게 물어봐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저… 앞으로 혜순 씨와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제 의뢰인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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