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직… 고민입니다. 제가… 너무 우유부단하지요?”
곤란해하며 길제범 씨가 말했다.
“아, 아닙니다. 괜한 질문을 드렸네요. 나름의 사연이 있을 텐데요.”
지아가 지나친 간섭이었구나, 하고 반성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범 씨가 적극적으로 나왔다. 뭔가 털어놓고 싶은 사정이 있는 듯했다.
“사실 제가 혜순이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긴데요. 변호사님…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당연한 일입니다. 변호사는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할 수 없습니다. 법률상 비밀 유지 의무가 있거든요. 공개될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그럼 믿고 말씀드릴게요. 혜순이는 저와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습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다들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지요.
판잣집 투성이 동네에 몇 채 안 되는 이층 양옥이 있었습니다. 게 중 눈에 띄게 잘 꾸며진 집이 있었는데요. 외벽이 전부 하얗고 담장엔 빨간 장미가 넝쿨째 피어있는 주택이었지요.
그 집에 딸 셋. 그중 첫째가 혜순이였습니다.
학교 운동장을 가로지르다 그녀를 처음 보았는데, 저는 그만 오줌을 쌀뻔했습니다. 허허, 참. 말해놓고 보니 부끄럽네요.
그날 혜순이는 남색 반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어요. 평범한 옷차림인데도 잊을 수가 없네요. 깨끗하고 건강한 이미지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친구를 기다리는지 그녀 혼자서 철봉 아래에 서서 운동화로 바닥을 콕콕 차고 있었지요. 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저보다 키가 훌쩍 컸었고 또래보다 성숙해 소녀티가 났더랬어요.
흐음~ 하나 더 생각나는 건, 학교 정문 게시판에 붙어있던 혜순이의 그림인데요. 전국 미술 실기 대회에서 수상한 작품이라며 전시된 적이 있었어요.
어떻게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등하굣길에 그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어릴 적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다는 건가요?”
“아니요. 혜순이는 저를 몰랐을 겁니다. 그래서 변호사님께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거고요. 그땐,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습니다. 먼발치서 쳐다만 봤지요.
우리 집은… 말이죠. 하아~~ 혜순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였어요. 아버지는 도박판에 빠져 집 나간 지 오래였고 어머니 혼자서 저를 길렀지요.
어머니는 시장에서 세 평 짜리 점포를 빌려 음식 장사로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우리는 가게에 딸린 코딱지만한 방에서 살았어요. 밤늦게까지 술손님이 있는 바람에 어머니와 저는 새벽녘에 잠들 때가 많았지요.
학교에 지각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해서 꼬질꼬질한 채로 학교에 갔었어요. 성장이 느려서 몸집이 아주 작은 편이었는데, 그 시기와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인간이 되었지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뭐. 그땐 어려서 힘든 걸 잘 몰랐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방직 공장에 들어가서 기술부터 배웠지요. 그러다 종잣돈을 만들어 반지하 가게를 하나 얻었습니다. 체육복 만드는 공장을 차렸는데 말이 공장이지 미싱 몇 대 가져다 놓고 시작한 일이었지요.
어머니 피를 물려받았는지 잇속에는 눈이 밝았던 터라 금방 수익을 냈어요. 운도 좋았습니다. 우리나라가 한창 발전할 때의 흐름을 탔던 것이지요. 그러다 사업체를 늘렸고 다양한 업종으로 확장했습니다.
신기하게 제 회사는 IMF 때 별 타격이 없었어요. 다른 기업이 무너지니까 상대적으로 더 성장하게 되었지요.
아내와는 한창 사업을 키울 때 만났습니다. 좋아하거나 사귀거나 뭐, 그런 사이는 아니었어요. 그냥 어쩌다 하룻밤을 보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몇 개월 후 어머니를 찾아왔다는 겁니다. 제 애를 임신했다며 집에 눌러앉아 있었습니다.
아, 사정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제가 사업차 넉 달 정도 중국에 나갔을 때였는데요. 돌아와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내가 생겼던 겁니다.
아내는 신경이 날카로운 편이었는데요. 제가 무심하다며 모진 말을 많이 쏟아냈습니다. 딸이 태어나고 잠시 상황이 나아지려나 했지만 좋은 시절은 얼마 못 갔어요. 아이가 커가면서 우리 관계는 불신과 비난으로 곪을 대로 곪아버렸습니다.
한집에서 매일같이 서로를 미워하며 불행한 시간을 보내다 결국 별거하게 되었지요. 그러다 우연히 혜순이를 다시 만나게 된 겁니다.
저는 그녀를 첫눈에 알아봤지만 혜순이는 저를 모르더군요. 당연한 일이지요. 오히려 다행이기도 했습니다. 코찔찔이였던 모습을 기억한다면 저를 남자로 볼 수는 없었을 겁니다.
혜순이는 보험 쪽 일을 하고 있었어요. 아마도 남편과 사별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던 것 같습니다. 혜순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저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생겨서 기뻤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몇 번 만나다 보니 점점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어졌습니다.
저는 돈만 벌 줄 알았지, 다른 분야는 무지렁이 수준이었는데요. 혜순이 맘에 들기 위해 몰래 공부를 많이 했더랬어요. 제가 알고 있는 인맥도 총동원했지요. 멋진 남자로 보이고 싶었거든요.
혜순이는 절 좋은 남자로 생각했어요.
아. 변호사님. 혹시 아시나요?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래서 아내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냈는데, 유방암이라고 하더군요.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 이혼하자고 하냐면서 별별 소리를 다 했습니다. 딸아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며 저주를 퍼부었지요.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습니다. 혜순이도 달리 저를 재촉하지 않았고요.
그녀의 무난한 성격이 저의 안일함에 구실을 만들어주었지요.
그러다 아내가 혜순이와 저의 관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해 제 명의로 소장을 제출했는데, 저는 변명도 해결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내에게 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죄책감이 있었지요.
아… 그런데 조정 당일 혜순에게 뺨을 맞는 순간. 그녀의 손보다 그녀의 눈빛이 더 아팠어요. 네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라며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가 보낸 시선이 어찌나 차갑던지…….
정말 바보 같은 소리지만, 그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녀가 저를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뭐든지 이해해 주었지요.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하도 익숙하다 보니 이것도 대충 넘어가 줄줄 알았던 거지요.
그때 알았습니다. 그녀가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죠. 세상이 온통 검게 물들었습니다.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죠.”
지아는 그제야 이해했다. 어떻게 둘 사이가 실망과 분노에서 급격하게 화해의 차원으로 건너갈 수 있었는지.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던 제범 씨의 안색이 갑자기 밝아졌다.
“아. 이런! 변호사님께 말씀드리다 보니 확실하게 정리가 되네요. 여전히 저는 어정쩡하게 넘어가려고 했던 것 같아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앞으론 혜순이와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봐야겠어요.”
***
토요일 아침이었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은영을 본다는 생각에 민우는 예상보다 일찍 일어났다.
여러 벌 옷을 꺼내놓고 입었다 벗었다 반복했다.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머리 모양을 잡아보고는 향이 좋다고 추천받은 스킨을 발랐다.
배낭은 어젯밤에 대충 싸두었다. 팩소주를 제일 밑에 깔고 그 위에 에너지음료와 생수를 넣었다. 초콜릿과 사탕을 몇 봉지 챙겼고 비상 의약품도 넣었다.
마지막으로 좀 전에 24시간 운영하는 족발집에 들러서 사 온 족발까지 담으니 가방이 터질 것 같았다.
배낭을 들고 오피스텔 주차장까지 내려가는데 상당히 무거웠다. 차 트렁크에 집어넣으면서 살짝 걱정이 앞섰다. 배낭을 짊어지고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여하튼 운전석에 앉아 기름의 양을 체크하고 시동을 걸었다. 북한산을 향해 출발했다.
10시까지 백운대탐방지원센터에서 모이자고 했던 것 같은데… 정상에서 먹을 단체 김밥도 찾아서 가야 한다.
시계를 보니 조금 늦을 것 같았다. 서둘러 액셀을 밟으며 민우는 걱정했다.
누가 계획했는지 난이도가 높은 길을 골랐다고 한다. 등산 마니아들을 고려한 등산로였다. 백운대까지 1시간 반, 시간은 짧지만 길이 험하다고 들었다.
은영은 괜찮을까, 잠시 염려됐다.
***
은영과 지아는 택시를 불러 타고 백운대탐방지원센터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는 많았지만 아직 로펌 사람들을 안보였다.
“뭐야. 열 시가 다 되었는데 왜 이렇게 안 오지? 다들 어디로 도망간 거 아냐?”
수민이 원치 않은 산행에 동원된 억울함을 온몸으로 내비쳤다.
“그러게… 곧 오겠지?”
수민과 달리 지아는 ‘북한산 국립공원입니다’라고 쓰인 표지판을 보며 살짝 설렜다. 남몰래 소풍 나온 기분이었다.
곱게 물든 단풍이며, 주차장 중앙에 조성된 커다란 석불, 이른 아침부터 영업하고 있는 카페까지 모두 마음에 들었다.
양명한 햇살 아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등산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