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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un 05. 2024

민우의 마음

줄지어 정상석을 보고 내려와 마당바위에서 쉬려는데 등산객들이 밀려들었다. 점점 더 복잡해질 것만 같아 단체 사진만 찍고 하산하기로 했다. 내려갈 때 힘 빠지지 말라고 민우가 에너지 음료를 나눠주었다.

     

 “가방 무게 줄이려는 거지?”

 소소한 변호사가 깐죽거리며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진정 진상(질량) 보존의 법칙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장인어른 모시고 가족 여행한다고 빠진 민선혁을 대신해 새로운 복병이 나타났다. 어딜 가나 불편한 인간이 있기 마련이었다.      


 다시 갈궈봤자 소중한 입만 아플 것 같아서 관뒀다. 지아는 로프를 잡고 안전하게 내려가는 일에 집중했다.

     

 그새 익숙해졌는지 오를 때보다 확실히 시간이 줄었다. 금방 대피소에 다다랐다. 정상과 달리 대피소는 한산했다.     


 “여기서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고 가지요.”

 대표가 말했다.     


 다들 쉼터 쪽에 모여서 선 채로 김밥을 욱여넣었다. 짧은 산행이었지만 아침부터 움직인 탓에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그때 짜잔~~ 하고 민우가 가방에서 족발과 소주를 꺼내기 시작했다.      


 “와우. 정변호사님은 센스쟁이”

 신입 여자 변호사 중 유일하게 정상까지 따라온 차주혜였다.      


 그녀가 엄지척과 함께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민우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몸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붙어 서서 민우의 가방 안을 들여다봤다.      


 화사한 그녀가 미소 짓는다. 늙수그레한 사내들도 덩달아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KNG에서 가장 어리고 예쁜 변호사. 남정네들이 어필하려고 너나없이 신경 쓰는 존재.     


 지아는 그녀에게서 젊음과 아름다움을 무심결에 과시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지난날 나도 저런 느낌을 다른 사람들에게 줬겠지?     


 민우가 차변호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뭐라고 속삭였다. 지아는 민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복잡한 심경이 더 어지러워졌다.      


 차주혜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민우가 종이컵에 조금씩 따른 소주를 그녀가 직접 들고 선배들에게 한잔 한잔 건넸다.      


 알코올과 고기로 흥겨운 분위기였지만 지아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아는 차주혜로부터 종이컵을 받자마자 쭈욱 한잔 들이켰다. 이번엔 민우가 소독약을 발라줄 때와 다른 방식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달아오른 김에 관심을 끌기 위한 아주 유치한 발상을 했다. 단풍이 된 지아가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 오늘 산에 오르면서 염소 보셨습니까?”

 “아니요. 김변호사는 봤나요?”

 “네. 바위 오를 때 정상 근처에서 봤습니다.”

 “근처에 염소 농장은 없을 텐데요. 어디서 염소가 왔을까요?”

 혹시 누구 아는 사람 있냐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대표가 말했다.    

  

 “김 변호사님. 그 염소, 색깔이 어땠어요? 흑염소였나요?”

 입맛을 다시며 소소한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이게 아닌데… 너의 그런 관심은 필요 없단 말이야.     

 

 역시 소소한은 진상이라고 지아가 단정 지을 무렵 대화의 주제는 염소에서 보양식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요즘 몸이 허하다, 벌써 노안이 찾아왔다, 밤에 힘이 없다. 기왕 말 나온 김에 오늘 하산해서 모두 몸보신하러 가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지아가 말했다.


 “저, 음, 그, 그 염소가 말이에요. 색깔이 좀 독특했어요. 검은 털이 있긴 했지만 주로 회색 같기도 하고 갈색 같기도 했어요.”     


 “어? 그거 염소가 아니라 산양 아닐까요? 산양은 희귀해서 천연기념물일 거예요.”

 민우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산양? 이쪽 동네에는 산양이 살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허허.”

 대표가 갑자기 민우의 말을 이어받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 김변호사가 귀한 산양을 봤다니 참 잘된 일이네요. 앞으로 행운이 따를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드는군요. 안 그래도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대표로서 요청 하나 하겠습니다. KNG의 최고 해결사이신 김변호사님께서 처리해 주시면 제가 걱정을 덜겠습니다.”      


 대표가 과장을 뒤섞고 존칭에 존칭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무슨 사건을 맡기려고 저렇게 분위기를 잡을까. 다들 긴장했다.      


 “협회 회장님이 특별히 부탁하신 사항입니다. 연말 변회 행사 때 우리 로펌에서 공연을 하나 준비해 달라고 하십니다. 듣자 하니 법무법인 다정에서는 작은 연극을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변호사가 그렇게 노래를 잘한다던데 정변과 듀엣 어때요? 김변의 훌륭한 실력으로 다정을 즈려 밟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변회의 최고 미남인 정민우변호사와 함께라면 인기투표에서도 경쟁력이 꽤 높을 것 같은데요.”    

 

 뭔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가 있나. 기, 승, 전까지야 수긍하더라도 결말이 왜?      


 대표의 전처가 운영하는 법무법인 다정에 대항할 사람으로, 굳이, 왜, 은영을 지목하는가? 지아는 대표가 못마땅했다. 흥미진진하게 지아와 민우를 번갈아 쳐다보는 나머지 사람들도 마음에 안 들었다.    

  

 “우리가 다정에 이기면 포상 휴가를 보내줄게요. 휴가비도 두둑이요.”

 대답을 머뭇거리는 지아에게 대표가 덧붙였다.      


 순간 민우와 지아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     


 띠리리릭.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민우가 오피스텔 현관에 배낭을 털썩 내려놓았다. 짐 정리를 뒤로하고 옷부터 벗었다. 먼지투성이 옷을 거실 바닥에 던져두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 샤워기 아래 서서 머리부터 적셨다. 평소 같으면 오 분이면 끝낼 목욕을 삼십 분째 하고 있었다. 비눗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다 맑은 물과 뒤섞여 배수구로 소용돌이치며 내려갔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민우가 소리 질렀다.     

 

 으아아아악!! 쪽팔려.     


 억눌러두었던 감정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오늘 자신이 얼마나 찌질했는지… 생각나 버렸던 것이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민우는 수건으로 대충 머리카락을 비벼 말리고 가운차림 그대로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처음부터 은영이 신경 쓰였던 것을 부인할 순 없다. 좋은 선배에 대한 호감과 염려가 있었다. 마음에 걸렸고 뭐라도 챙겨주고 싶었다. 그랬던 감정이 조급함과 안달복달로 비약하게 된 것은… 그녀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순간은… 언제부터였을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안 보면 보고 싶고 못 보면 더 그리워지는 법.      


 사건을 함께 하면서 자주 얼굴을 보고 밥도 한 번씩 먹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TF팀에 소속된 후로 은영을 보지 못했다. 혹시나 마주칠까 싶어 위층 화장실을 쓴 적도 있고 만날 가능성을 고려해 동선을 짜기도 했다. 은영의 사무실 앞을 서성이기까지 했는데 은영은 그림자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윗사람이라 용건 없이 함부로 방에 들를 수도 없는 형편인데 심지어 야근을 밥 먹듯 하던 은영이 칼퇴근 모드로 되돌아가 버렸다. 회사에서 마주칠 확률은 더욱 줄어들었다.      


 마음을 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사정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리라.   

   

 민우는 단합대회를 손꼽아 기다려왔다. 나란히 올라가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지치거나 힘들어하면 마실 걸 건네주고, 바위 오를 때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줄 예정이었다. 혹시나 발이라도 삐끗하면 그 핑계로 업어줄 기회라도…     


 티 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은영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민우는 팔을 들어 눈을 가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은 좋았다.      


 그러나 민우가 예상치 못한 사정은 은영이 날다람쥐였다는 것. 자신보다 훨씬 산길을 잘 걸었다. 서둘러 은영을 좇아가려는데 가방이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도 챙기려고 양을 늘렸더니 지나치게 무거웠다.      


 겨우 정상에서야 둘만 있게 되었는데 은영의 팔에 피가 나는 것을 보고선 급하게 잡아당겨 버렸다. 약을 발라주면서 또 손가락이 어찌나 떨리던지,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자신을 무례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바보 같다고는?


 하~


 조심했어야 했다.      


 더 속상한 것은 정상에서의 대화였다.      


 “재건축 사건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민우가 밴드를 붙여주고 있을 때 은영이 물었다.      


 “조합의 매도청구에 대해 다투는데 소유물이 주택단지 안이냐 밖이냐, 토지냐 주택이냐 등으로 피고의 사정이 제각각입니다. 매도청구권 행사의 적법성 여부가 주요 쟁점이고 조합설립인가의 위법성을 다투는 행정소송이 여러 차례 진행되었던 상황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거기에 업무 모드로 답해버렸다. 기껏 산에 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사건 브리핑이었다.      


 “행정소송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합설립동의 여부에 대한 최고는 제때 이루어져야 해요. 그리고 적법한 최고가 없으면 매도청구가 위법하게 되니까 조합에서 적법한 최고에 대한 증명책임을 져야겠지요?”     


 은영은 사건에 관한 힌트를 주었고 그렇게 둘의 대화가 끊겼다. 뒤따라온 사람들로 인해 다른 이야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뒤풀이 장소에서 만회할 기회를 엿봤다. 연습 삼아 은영과 듀엣으로 노래하게 되었을 때 휴가비라도 챙겨드려야지, 했다. 그런데 하필 오늘따라 목이 갈라지고 박자 음정, 모두 흔들렸다.

     

 “아무리 잘생겨도 이 실력으론 안 되겠어요. 대타를 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면 정변! 다른 걸 개척해 봐요. 노래로는 공연 못할 것 같네요.”     


 소파에 누워있던 민우의 귀에 야멸찬 대표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민우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그러고 보니 둘이서 사진 한 장 찍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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