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 May 29. 2024

내겐 너무 가벼운 등산

 10시였다.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김 변호사 왔어요?”


 쑥색 배낭을 짊어진 남자가 가까이 오더니 지아에게 말을 걸었다. 청남색 등산복을 위아래로 입고 밝은 갈색 모자를 쓴 중년의 신사였다. 처음엔 누군지 긴가민가했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수민이 먼저 알아보고 인사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대표만 보다가 사복을 입고 있으니 과히 낯설었다.    

 

 “아유, 대표님이셨네요. 너무 멋진 분이 계셔서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그새 조직 생활에 적응한 지아가 립서비스를 날렸다.      


 “아이고, 김변호사. 고마워요~~~ 두 분 오늘 뒤풀이까지 참석할 거지요? 제가 경품도 많이 준비했으니 장기자랑에도 참여해 주세요.”


 대표가 말했다.     


 “장기자랑 시간이 있어요?”

 언제 다가왔는지 민우가 바로 곁에서 물었다.    

  

 김밥을 상자째로 이고 서 있었다.      


 “정변, 상자 내려놔요. 무겁게…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대충 보니까 참석자도 얼마 안 될 것 같은데.”

 로펌에서 총무를 담당하는 소소한 변호사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총무가 인원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고 우리 정변에게 일 시킨 거예요?”

 지아가 뾰족하게 소소한 변호사를 타박했다.     


 “아. 죄송합니다. 김변호사님. 다들 바쁘다 보니 참석 여부에 대한 답을 제대로 안 해서요.”

 머리를 긁적이며 소소한 변호사가 변명했다.     


 순간적으로 쏘아붙여 놓고선 지아는 의아했다.


 내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지? 왜 소소한 변호사에게 날을 세울까?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정말로 민우의 사수 같잖아?      


 지아가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는 동안 로펌 구성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서른 명 남짓이었다. 절반도 오지 않았으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총무는 부재자에게 전화를 돌리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전화기 건너편에는 뒤풀이에 오겠다는 대답, 다른 핑계를 대며 참석 못 한다는 이,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반응이었다.    

  

 여기저기서 군소리가 들렸다.     


 “라떼는 말이야. 이런 데 빠진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지.”

 “요즘 애들은 참, 자유로워~”     


 말이 단합대회지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인 셈이었다. 물론 멋모르고 끌려온 수민과 같은 이도 여럿 있었다.     


 사태가 더 나빠지기 전에 정현우 변호사가 한마디 했다.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소리를 하세요. 자, 그만하시고 함께 올라가시죠.”     

 꼰대들의 투덜거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민우가 사 온 김밥을 나눠서 들고 더 늦기 전에 산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때 수민이 말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제 발이 협조를 거부합니다. 저는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모두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집합 장소에 도착한 걸로 자신의 책무는 끝났다고, 위로 올라가는 건 원하는 사람만 하는 거라면서 고집을 부렸다. 수민이 애절한 표정과 애교를 섞어서 애원하니 다들 수긍하고 말았다.   

  

 지아는 어쩔 수 없이 수민을 남겨두고 등산을 해야 했다.     


 수민과 뜻을 같이하는 몇 명은 커피숍을 향해 사뿐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머지는 줄지어 등산로로 들어섰다.      


 아. 그런데 은영의 발이 척척척.      


 제멋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어찌나 빠른지 너무나 신기했다. 발이 잘 움직이니 숨도 차지 않았다.


 이런 날다람쥐가 있나. 수많은 돌계단을 아무렇지 않게 올랐다. 구두와 등산화의 차이였던가.   

   

 은영의 몸은 평지보다 가파른 길을 더 잘 걸었다. 체력이 약해서 고생했던 지아는 가뿐한 몸놀림에 형용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이런 게 등산?     


 보조를 맞춰야 할 수민도 없겠다. 지아는 신나게 산을 올랐다. 어느 순간 동료들이 안 보였다. 혼자서 앞장서 걷고 있었다.      


 타박타박. 지아가 땅을 디디는 소리가 고요한 숲을 흔들었다. 가까운 우듬지에 몰려있던 새들이 푸드덕, 하고 날아오르더니 다른 가지를 찾아 옮겨갔다. 새들의 지저귐이 공기 중에 파동을 일으켰다.      


 도토리를 물고 가던 청설모가 인기척에 놀라 나무 위로 재빨리 올라갔다. 청설모를 따라 시선이 하늘로 향하다 그만 아! 이런! 어쩜! 감탄사를 남발했다. 태양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쏟아지는 반짝임 아래 지아는 두 팔을 한껏 벌렸다. 가슴을 펴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폐에 신선한 공기를 가득 채웠다. 손나팔을 만들어 야호 하고 싶은 유혹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시도하려다 주춤.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가서 해야지, 마음먹은 후 겉옷을 벗어 허리에 둘렀다. 뺨 가까이 바람이 지나갔다. 땀이 식으면서 시원했다.      


 열이 내리자 다시 빠른 걸음으로 백운대피소로 향했다. 대피소까진 걸을 만했다. 금세 도착했다. 잠시 쉬기 위해 나무 벤치에 앉아 등산화를 벗어 신 안의 돌멩이를 털어냈다. 혼자서 너무 멀리 온 것만 같아 일행이 오기를 기다렸다. 숨을 돌리려고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그러나 여전히 감감무소식.      


 도대체 이들은 언제 오려나. 먼저 올라갈까 고민하는 사이 하산하는 등산동호회 사람들을 만났다.     


 “백운대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지아가 물었다.     


 “금방이에요. 쪼금만 가시면 됩니다. 파이팅!!”     

 가장 앞서 내려오던 남자가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응원에 지아도 미소로 화답했다.     


 금방이라는 말에 정상까지 한달음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힘을 내어 걸었다. 타닥타닥.   

  

 하지만 웬걸, 여기서부터가 고비였다. 경사가 점점 심해졌고 길이 험했다. 눈앞에 바위. 또 바위. 수많은 바위가 지아를 지치게 했다. 가파른 바위 행렬과 반대편엔 아찔한 낭떠러지.     


 과연 올라갈 수 있을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암벽 등반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회의할 때쯤 염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산에 염소가 산다?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염소는 놀리듯 음혜혜, 하더니 가볍게 암벽을 타고 위로 올라가 버렸다.      


 지아는 염소의 꽁무니를 따라 로프를 잡고 기다시피 암벽을 올랐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염소는 온데간데없고 산마루엔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떡하니 지아를 맞이하고 있었다.

    

 와우!! 반사적으로 찬탄이 튀어나왔다. 복작복작 다투며 살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발아래, 한쪽엔 레고로 쌓은 장난감 같은 건물들이 빼곡히 모여있었다. 다른 쪽엔 지구의 힘줄처럼 쭉쭉 뻗어나가는 능선과 깊은 계곡이 눈에 들어왔다. 색색이 물든 단풍과 새파란 하늘이 대비되어 가을을 코앞까지 데려왔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지아는 그저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저 밑 세상에서 묻혀온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올라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누군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가까이 왔다.      


 “변호사님, 정말 빠르시네요. 따라오느라 힘들었습니다.”     


 돌아보니 민우였다. 땀범벅이 된 그가 자신의 키만큼 커다란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도대체 저렇게 큰 가방이 왜 필요할까.      


 지아가 궁금해하는 사이 민우가 의문의 배낭을 열어서 밴드와 소독약을 꺼냈다.      


 “변호사님, 이리로 와서 좀 앉아보세요.”

 “??”     


 갑자기 얘가 왜 이래?

 지아가 주춤거렸다.      


 “팔에서 피가 나요. 소독해야 할 것 같은데요.”

 “응? 언제 다쳤지?”     


 그제야 걷어 올린 소매 아래 살짝 긁힌 자국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바위를 기어오르다 로프에 부딪힌 것 같았다.      


 “아프지도 않은데, 뭘. 굳이…”

 “그냥 두면 흉터가 생길 겁니다.”


 지아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민우가 잔소리했다. 그러곤 팔을 당겨 소독약을 바르고 조심히 밴드를 붙여주었다.      


 아~~~ 이것은? 바람에 식었던 몸이 다시 뜨거워져 지아를 불타는 단풍나무로 만들었다. 인간으로 돌아오기까지 속수무책으로 있다. 평소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책망할 수밖에.

   

 민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배낭에서 초콜릿과 생수를 꺼내서 지아에게 건넸다.      


 “배 안 고파요?”

 “괜찮아. 곧 김밥 먹을 텐데, 뭐.”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초콜릿을 보고 있자니 침이 고였다. 잠시 망설이다 지아는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었다. 달콤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마침 떨어지던 당이 정상을 회복하자 지아의 심장이 속삭였다.     


 ‘야. 민우. 너 이러면 안 돼. 왜 날 설레게 하고 그러냐?’     


 애써 접으려던 마음에 파장이 일었다. 아찔한 찰나… 뒤따라온 일행들의 소리가 지아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야호!!!”

 “야~~~ 호오오!!”     

 몇몇이 고함을 질러댔다. 엄청난 성량이었다.     


 뒤이어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분, 그렇게 소리 지르면 야생동물이 놀란답니다. 맺힌 게 많은 것 같은데 소리는 내려가서 노래방에서 지릅시다.”     


 막 도착한 정현우 변호사가 그들을 말리고 있었다.

이전 16화 입장에 따라 다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