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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Mar 20. 2024

본색을 드러내면 안 되는데…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만 굴린다고 사건이 해결될 리 없었다. 지아는 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이명섭 씨의 부친이 치료받았던 병원을 방문할 요량이었다. 명섭 씨의 이야기만으로는 사건의 윤곽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누군가 지아를 불렀다.    

 

 “김은영 변호사님.”


 돌아보니 민우였다. 민우 곁에 있던 남자 변호사 몇이 동시에 지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아는 가볍게 눈인사로 답하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민우가 뛰어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손으로 잡더니 물었다.    

 

 “어디 가세요?”

 “명섭 씨 사건 때문에 병원에 가볼까 해서요.”

 “저도 따라갈게요. 로비에서 오 분만 기다려 주세요. ”     


 계획에 없던 동행을 거절하지 못하고 1층에서 시계만 쳐다보고 있는데 정말 딱 오 분 후에 민우가 나타났다. 민우는 명섭 씨로부터 받은 가족관계증명서와 진료기록부 열람에 대한 위임장을 챙겨 왔다. 함께 주차장으로 가는 사이 병원에 미리 전화해 두었다는 보고까지 한다.     

 

 이렇게 똘똘한 어쏘라니. 은영은 은근히 인복이 많았다.      


 얼떨결에 민우가 운전하는 차량의 조수석에 앉은 지아는 법인에서 제공하는 차를 구경하느라 한눈을 팔았다.     


 오. 좋은데. 역시 이름 있는 로펌은 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좁은 공간에 둘만 있는 것이 어색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울의 도로는 여느 때와 같이 붐볐다. 차선을 바꾸려고 갑자기 끼어드는 차에 화가 난 한 운전자가 열린 창문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경적을 울려댔다.      


 지아는 신경이 예민해졌다. 도로 위의 생태계는 사회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쪽에선 실랑이가 벌어지고 뒤에선 빨리 가라고 재촉하고. 다들 참 열심히 살고 있었다. 하늘에서 방금 떨어져 어리둥절 인간사에 적응을 못 하는 천사(?)가 된 기분이었다.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때 민우가 FM 라디오를 켰다. 쇼팽의 녹턴이 흘러나왔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멜로디는 금세 차 안을 고요한 세상으로 데려갔다.      


 민우는 천천히 대학병원을 향해 차를 몰고 갔다. 지아는 피아노 선율에 귀를 기울이면서 점차 편안해졌다. 역시 지아에게 음악은 최고의 치료제였다. 새 몸에 적응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감각이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           


 대학병원에서는 큰 수확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명섭 씨의 말대로 6주간에 걸친 첫 항암치료로 암세포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이후 두 번째 치료를 예약하고 환자가 재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정만 확인되었다. 구체적인 원인에 대해 병원에선 아는 바가 없었다.     


 “딱히 쓸만한 정보가 없어 아쉽네요.”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민우가 말했다.      


 “위법하다고 할만한 가족들의 행위를 밝힐 수 있다면 손해배상청구라도 해볼 텐데요. 다음엔 망인이 사망하기 전에 기거했던 요양병원에 가봐야겠어요. 거기선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네요.”


 지아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변호사님은 늘 창조적으로 사건을 해결하시죠. 그런데 요즘 자꾸 혼자 다니시는데, 가실 때 미리 저에게 언질이라도 주세요. 입사 초만 해도 변호사님과 참 자주 현장에 갔었는데 말이죠.”     


 뭐지? 이 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머리가 마구마구 복잡해졌다. 민우의 말은 속뜻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일반적인 회사생활에 관해 문외한인 지아는 어느 선에서 후배를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소 은영의 태도를 모르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혼자 생각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민우가 화제를 바꿨다.

    

 “참. 변호사님. 오늘 정현우 변호사님 팀 회식 자리에 우리도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어떻게 할까요? 평소 변호사님이 좋아하시는 참치회로 메뉴를 정했다고 하네요.”


 날것을 잘 먹지 않는 지아로선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지만 은영을 배려해서 초대하는 자리라니 빠질 순 없었다. 회사 분위기도 알아보고 은영의 인간관계도 파악할 겸 참석하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네. 참석하지요.”

“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지아의 대답에 차 안의 공기가 살짝 들떴다가 가라앉았다.      


***     


 회식 자리는 신사동의 어느 횟집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한 블록 걸어가는 사이 번쩍이는 네온사인으로 낮보다 화려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식당과 술집이 밀집된 곳에선 삐끼가 나와서 행인들에게 호객행위를 했다. 민우는 은근슬쩍 몸으로 막으며 지아를 배려해서 걸었다.     


 곧이어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이 눈앞에 보였고 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종업원이 뛰어와 문을 열어주었다. 식당 내부는 온통 원목으로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공간은 각각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안내된 곳의 문을 열었을  이미 정현우 변호사라는 사람과 직원 몇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김변호사님, 오셨어요?”


 정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악수까지 청했다.      


 이쪽 문화인가? 같은 법인이라도 자주 얼굴을 못 보나? 의아했지만 태연한 척 지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맨날 일만 하시던 분이 한 주간 안 보여서 다들 걱정했다고 합니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어요?”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을 붙였고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일어나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훈훈하고 황송한 대접이었다. 그사이 식당 점원이 조용히 다가와 상의와 가방을 받아서 옷걸이에 걸어주었다.     


  “아유. 걱정을 끼쳤다니 죄송합니다. 저는 집에서 좀 쉬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좋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아는 정 변호사 맞은편에 앉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정 변호사는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끌어갔고 식사 자리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했다. 가까이 마주 보며 앉아있자니 다들 인상이 참 좋았다. 외모로 사람을 뽑는 로펌인가 싶을 정도였다.     


 특히 정 변호사는 시원한 눈매를 가진 호감형으로 신뢰감을 주는 타입이었다.      


 이 회사엔 왜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많지? 온통 꽃미남 판이네.      


 눈이 즐거워 입도 즐거워진 지아가 애피타이저로 나온 음식을 맛나게 먹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열리면서 헐레벌떡 한 사람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재판이 늦게 끝나서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민선혁. 바로 그였다.      


 저 인간이 왜 여기에? 좋았던 기분이 싹 달아나버렸다.      


 지아는 좀 전에 로펌 구성원들의 인상이 모두 좋다고 생각을 곧바로 철회했다.     


 “선배님. 여기.”


 지아의 기분과 무관하게 민선혁은 정 변호사에게 다가와 고급 양주 하나를 내밀었다.      


 “회식한다고 했더니 아내가 챙겨줬어요. 저는 잘 모르는데 아내 말로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싱글몰트라고 합니다.”


 연신 굽신거리는 모습이 몹시 비굴해 보였다.      


 “고맙다고 전해줘요. 민 변호사.”


 정 변호사는 민선혁이 주는 선물을 흔쾌히 받아 들고선 곧바로 위스키의 뚜껑을 땄다.

     

 “좋은 것은 우리 김 변호사님부터 드려야지요.”

 하면서 민선혁이 가져온 술을 지아의 잔에 채웠다.      


 순간 민선혁의 얼굴이 남모르게 구겨졌다.     


 주방장이 들어와 음식에 대한 설명으로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았다면 지아는 불편한 마음을 드러낼 뻔했다.      


 이 술을 마시면 토하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으로 민선혁의 태도가 거슬렸다. 백화점에서 보았던 거만하기 짝이 없던 민선혁이 정 변호사 앞에선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었던 것이다.     


 어쩜 저렇게 이중적일 수 있을까.      


 윗전의 눈에 들지 못할까 쩔쩔매는 모습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인간을 뭘 보고 좋아했을까. 슬그머니 은영에게 화가 났다.      


 아니다. 어쩌면 처음엔 은영에게도 저랬을지 모른다.      


 어느 순간 만만한 대상이 되어버린 까닭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다행히 지배인이 들어와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메인 요리를 내놓는 바람에 지아는 민선혁에게서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예쁜 접시에 놓인 회를 보니 전에 없던 시장기가 몰려왔다.      


 “여기 회가 참 좋습니다. 어서 드세요.”

 정 변호사가 젓가락을 들면서 말했다.      


 지아도 한 점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런데 이것은! 씹을 것도 없이 셔벗처럼 살살 녹아 없어지는 게 아닌가.      


 “정말 맛있네요.”


 이제껏 먹어본 회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지아의 칭찬에 정 변호사가 앞 접시에다 이것저것 놓아주며 말했다.     

 

  “김변호사님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일전에 여기서 의뢰인에게 대접받은 적이 있었는데 주방장의 솜씨가 일품이더군요. 이것도 한번 드셔보세요.”


 자신보다 한참은 연상으로 보이는데 정 변호사는 꼬박꼬박 존대하면서 지아를 챙겼다. 지아는 자신이 그다지 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식도락에 빠져들었다.      


 민선혁이 가져온 술도 홀짝 마셔버렸다.      


 토할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술은 술술 잘도 넘어갔다. 지아가 잔을 비우자  변호사는 놓치지 않고 바로 한잔 더 따라 주었다.      


 알코올이 돌면서 점점 흥을 더했고 직원들이  변호사와 지아를 치켜세웠다.      


 “우리 로펌엔 두 분이 계시니 걱정할 일이 없어요. 복잡한 사건도 죄다 해결하시고.”

 “오늘도 골치 아픈 사건 하나 승소했잖아요.”

 “의뢰인이 너무 좋아서 회식비를 바로 현금으로 주고 돌아갔어요.”

 “2차도 가시는 거지요? 변호사님?”     


 막내로 보이는 여직원이 지아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아는 은영이 아무래도 술 체질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     


 정신을 차려보니 지아는 가라오케가 설치된 카페형 술집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게다가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지아를 향해 있었고 특히  로펌 직원들은 놀라 턱이 빠져버린 표정으로 지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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