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 섬
모아이의 섬, 이스터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세트쯤은 갖고 있었을 백과사전.
위인전, 공룡, 식물, 세계사 등등 족히 서른 권은 되었을 수많은 책들 중에서 단연코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세계의 불가사의’였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영국의 스톤헨지, 페루의 마추픽추, 어느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스터 섬의 모아이도 그중 하나였다. 칠레 본토와 수천 킬로 떨어진 외딴섬, 원주민들은 왜 수백 개의 거대 석상을 세웠는가. 또 어떻게 그 무거운 돌들을 옮겼나 하는 것은 어린 나의 눈에도 엄청나게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그때 결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불가사의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겠다고…
칠레 여행 일정에 이스터 섬을 넣게 되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될 것이었다. 일정 또한 밀릴 수 있었다. 가난한 배낭여행객에겐 꽤 고민스러운 문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했다. 그 섬엔 바로 그 ‘모아이’가 있었으니까.
라노 카우와 오롱고
이스터 섬은 무려 세 개의 화산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진 섬이다. 그중 가장 큰 화산이 바로 라노 카우. 항가로아 마을에서 차로 15분 정도만 가면 해발 300m에 위치한 라노 카우 분화구를 볼 수가 있다. 일단 라노 카우에 올라서면 생각보다 크고 아름다워서 그 장엄하고도 웅장한 풍경에 압도당하게 된다.
라노 카우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바로 오롱고가 나타난다. 작은 박물관이 서 있을 정도로 이스터 섬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다. 부족 간의 싸움이 잦았던 이스터 섬. 평화적 통치를 위해 해마다 봄이 오는 9월이면 각 부족을 대표하는 젊은이들이 이곳에 모였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을 펼쳐서 1년간 즉위하게 될 ‘탕가타 마누 [탕가타는 인간을 마누는 새를 뜻하는 라파 누이어]’라 불리는 리더를 뽑았다. 험난한 미션은 무려 300m 가까이 되는 절벽을 타고 내려가 갈대 다발로 만든 배에 몸을 싣고 거친 바다를 건너 모투 누이 섬까지 헤엄쳐서 갔다가 철새인 검댕 갈매기의 갈색 반점이 있는 새알을 가지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오롱고에서 모투 누이 섬을 바라보면 이 젊은이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목숨을 건 사투를 펼쳤을지 조금은 짐작이 된다. 사실 모아이만 보고 이스터 섬에 왔었는데, 곳곳에 숨어있는 라파 누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이다.
통가리키의 일출
새벽 4시, 아직은 캄캄한 시간이었지만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이 통가리키에 모였다. 바로 모아이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기 위해서다. 바닷가 앞에 줄지어 선 15구의 모아이들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은 종교의식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아이가 무엇인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오죽 답답하면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설까지 돌았을까. 하지만 바로 그 미스터리가 사람을 매료시키는 거다. 무엇인지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자리에 서있는 것.
그 미스터리 사이로 해가 떠올랐으니 통가리키의 일출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거센 파도는 물안개를 만들어내고 해가 모아이의 키를 훌쩍 넘어 꽤 떠올랐음에도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들 같은 것을 느꼈겠지만 나도 아직 그게 뭔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여하튼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일출 Top 10’ 뭐 이런 리스트가 있는데 통가리키가 빠져있다면 그 리스트는 믿을 수 없는 거다.
라파 누이 러브
저녁 먹을 곳을 찾아 항가 로아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데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분위기를 보니 매년 이맘때면 열리는 축제인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만든 음식과 수공예품을 파는 부스들이 늘어서 있고 무대 위에는 공연이 한창이었다. 바닷가에선 아이들이 서핑을, 사람들은 한가롭게 풀밭에 누워있다. 한쪽에서는 바비큐를 굽고 한쪽에서는 전통의상을 입은 무희가 춤을 춘다. 내가 꿈꾸던 섬 생활을 축약해 한 장면에 보여준다면 바로 이것이다 싶을 만큼 모든 게 완벽했다.
바비큐 한 접시를 사다가 맥주를 홀짝이며 나도 이 섬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 양 풀밭에 누워 여유를 만끽했다. 해가 지고 컴컴한 밤이 되어서야 마지막 밴드가 올라왔다. 다른 건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라파 누이 러브’라는 가사만은 귀에 쏙쏙 박혔다.
사실 이스터라는 이름은 네덜란드 선장이 이 섬을 발견하던 날이 부활절이라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중남미 여행을 하다 보면 조금씩 화가 나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침략자인 서구의 시각이 너무나 많이 잔존해 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스터 섬도 원주민들이 부르는 원래 지명은 거대한 땅이라는 뜻의 ‘라파 누이’라고 한다. 구슬픈 멜로디에 ‘라파 누이 러브’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타국의 여행자에게도 와닿았다. 만약 이스터 러브였다면? 영 아니올시다였을거다.
라노 라라쿠 채석장
모아이 채석장이었던 라노 라라쿠 산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모아이를 옮기려면 많은 나무가 필요했는데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라노 라라쿠였기 때문에 이 부분이 미스터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모아이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나무가 무성한 숲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세상에 얼마나 많이 베어냈으면 단 한 그루도 보이지가 않는 건지... 연두연두한 잔디가 부드럽게 깔린 민둥산에 만들다 만 거대한 모아이들이 드문드문 심겨 있는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이스터 섬에 남아있는 모아이들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00여 개의 석상이 라노 라라쿠에 있기 때문이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받으며 말없이 서있는 모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모두들 그렇게 느꼈는지 라노 라라쿠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무척 조용했다. 조용히 모아이 사이를 걸으며 저어 멀리 보이는 태평양 바다와 통가리키를 보며 잠깐씩 쉬어갈 뿐이었다. 모두들 이게 지구상에 유일한 풍경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렌터카 여행의 묘미
모아이 때문에 이스터에 왔지만 이스터는 섬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다.
짙고 푸른 바다, 거센 파도, 독특한 분화구와 여러 가지 전설이 얽힌 섬들.
현무암 앞에서 말들이 풀을 뜨는 모습은 영락없는 제주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야자수에 모아이가 서있는 해변에 누울 때면 이곳이 태평양 한가운데 떠있는 외딴섬임을 깨닫곤 한다. 제주도도 물론 좋지만 이스터 섬에는 뭔가 더 원초적인 에너지가 있다.
이런 이스터 섬의 다양한 면모를 즐기려면 오토바이든 자동차든 렌트를 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스터 섬에는 대중교통이 없다. 팍팍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해안도로를 달리는 기분이란… 내키는 곳 어디든 차를 세우고, 산책을 하든 명상을 하든 싸가지고 온 샌드위치를 먹든, 온전히 내 맘대로 여유로운 일정을 만끽할 수 있다. 치안이 좋지 않기로 유명한 중남미 도시들을 긴장하며 다니다 온 이스터 섬이었기 때문에 이런 여유는 가뭄에 단비 같은 것이었다.
참고로 이스터 섬에는 오토매틱 차량이 드물다. 그러니 수동 운전을 할 줄 안다면 금상첨화! 아니면 이 기회에 클러치 좀 밟아보고 기어 좀 바꿔본다 생각하면 좋다.
항가 로아의 보랏빛 일몰
개인적으로 일출보다는 일몰을 선호하는 편이다. 일출을 보려면 아침잠을 이겨가며 어둠과 추위 속에서 해가 떠오르길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에 비해 해가 뜨는 것은 너무나 짧은 찰나이다. 그에 반해 일몰은 여운이 길다. 길게 드리워진 오후 햇살을 즐기다 보면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그 뒤로도 내내 하늘은 핑크빛에서 보랏빛으로 물든다.
항가 로아에서의 일몰이 더 좋았던 건 여행객들보다 주민들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사실 여행을 하다 보면 유명한 관광지에서의 일몰시간에는 이국의 여행객들만이 득시글하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지만… 하지만 항가 로아에서의 일몰은 달랐다. 여행객보다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가족단위로 나와서는 잔디밭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해가 지고 하늘이 점점 더 예쁘게 물들어 가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숙소 주인아저씨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라파 누이 원주민들은 이름도 없이 번호로 불렸고 노예처럼 부려졌다고 한다. 같은 20세기를 살았는데, 이들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그런 처우를 받았다니,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나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몰랐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항가 로아의 보랏빛 노을을 매일매일 볼 수 있다는 건 그 시절을 견뎌온 라파 누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보상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