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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박스 Oct 23. 2022

호모 박스쿠스, 택배 상자를 붙잡다

집에 사람은 오지 않고 상자만 왔다. 아파트 상자에 사는 나는 매일같이 택배 상자를 받았다. 코로나19는 내게 택배 상자를 줬다. 수세기 후 인류가 나를 '호모 박스쿠스'라고 명명할지 모를 일이었다.  


'까똑! 상자 모닝!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상품이 배송 완료되었습니다.'


현관을 열면 쓰으윽, 택배 상자가 문에 밀려 바닥에 쓸렸다. 상자와 복도 표면 사이에 생긴 마찰음이 새벽 정렬을 흐트러뜨렸다. 묵직한 상자를 양손으로 끌어 현관 안으로 들여놓는 게 기상 직후에 하는 첫 일이었다.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내고 사면의 날개를 바깥쪽으로 열어젖혔다. 파 1단, 두부 2모, 달걀 10구, 우유 2팩, 콩나물과 숙주나물 각각 1 봉지, 쌀 뻥튀기 2 봉지, 소불고기 1팩, 고르곤졸라 피자 1+1판. 새벽 배송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신생 바이러스 사태를 견뎠을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상자에서 꺼낸 식재료를 냉장 칸, 냉동 칸, 실온 선반에  나누어 정리했다. 음식을 빼고 나면 빈 상자를 뒤집어서 바닥면에 붙은 테이프를 제거하고 납작하게 접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 분리수거 날은 매주 수요일이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다용도실 한편에 차곡차곡 상자가 쌓였다.


상자를 받고, 물건을 빼고, 상자를 접고, 상자를 받으며 한 달이 가고, 상자를 접다가 두 달이 가고, 자연이 여러 차례 색을 바꾸는 내내 상자를 버렸다. 버릴 때마다 이거 미술 재료로 딱이란 생각이 들곤 했다. 전날 밤에 포장해서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하는 깨끗하고 판판한 종이 재료였다.


2년째 코로나와 대치 중이던 겨울 어느 날, 나는 택배 상자를 내다 버리지 않았다. 상자의 이음매를 뜯어서 거실 바닥에 기다랗게 툭 펼쳤다. 십 년 넘게 처박아 둔 붓을 집구석 어딘가에서 잡아 뺐다. 급한 데로 다 있다는 가게에 가서 물감을 여러 통 사 왔다. 크리스마스다! 올해엔 트리를 그려서 세워보자는 다짐으로 펼친 상자를 잡았다.


그 해는 철봉 오래 매달리기를 할 때 목구멍 사이에서 나는 메마른 헛바람과도 같았다. 목이 마르도록 버텼다. 남편의 직장 상황이 뱃멀미 나게 요동쳤고, 경력 단절 주부인 나는 사면에서 부는 칼바람으로 인해 현기증을 느꼈다. 생활은 건조했고, 여기저기서 한겨울 정전기 일듯 스파크가 튀었다. 2021년 크리스마스가 촉촉함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울의 진흙탕에 엎어졌다가도 한편으론 호들갑 떨지 말자고 머리칼을 매만졌다. 외나무다리를 아슬아슬 건너고 있지만 떨어진 건 아니니까. 코로나로 가게 문을 닫은 사람이 수두룩한데 괜한 엄살을 부릴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유독 나에게만 일어난 일인 것처럼 크게 의미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보통 인간인 나는 추스른 마음을 한 시간 이상 지탱하기 어려웠다.


아이가 없었다면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건 머릿속에도 없었을 거다. 달콤한 맛없이 텁텁한 처지에도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곧 최고 형님이 되는구나. 엄마인 내가 아이의 초등 입학 전 일 년 동안 해줘야 할 건 뭘까를 고민했다.


나는 단순하게 지금 곧바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애썼다. 나는 미명에 도착해 새벽 냉기가 채 사라지지 않은 상자를 붙들었다. 오늘의 양식을 담아 갓 도착한 생계 상자를 잡아 펼쳤다. 인생에 칼바람이 부는데 웬 택배 상자?! 자꾸 빵을 줄까 말까 알짱거리는 녀석들한테서 빵 부스러기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쫓아다니면 안 된다. 예술이나 한방 받아라! 녀석들의 허에 정통으로 날려주고 싶었다. 스트라이크!


사실 내가 택배 상자의 이음매를 박박 뜯던 모습은 존재의 발악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엔 붓으로, 나중에는 스펀지로 크레이지 물감 찍기에 온 에너지를 발산하던 나를 보며 인간의 예술 욕구란 본능의 표출이거나 존재의 몸부림 중 하나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몰입하면 자유했다. 아이를 위한 일이라 여겼지만 나를 위함이 더 절실한 이유였을 거다. 오늘까지도 택 to the 배 to the 상자 해방 일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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