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넘버블럭스(Numberblocks)> 애니메이션 사랑이 두 달 넘게 이어졌다. 아이들은 어제 사준 장난감도 오늘이면 싫증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 특성을 감안하면, 긴 기간 동안 한 주제에 관심 갖는다는 게 놀라웠다. 아이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숫자 캐릭터가 되는 놀이를 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이가 여러 개의 캐릭터를 오갈 수 있는 구조로 만들고 싶었다. 큐브 형태로 만들면 어떨까. 아이가 갖고 있는 큐브가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행과 열을 돌려서 색을 맞추는 일반적인 것과 달랐다. 큐브가 오므려지거나 펼쳐지고, 한 개를 더 합치면 또 다른 형태의 큐브로 확장됐다. 나는 모으고 펴는 구조를 눈여겨봤다. 그리고 같은 크기의 택배 상자 4개를 준비했다.
상자 이음매를 뜯을 필요 없이 육면체 그대로 둔 상태에서 윗면의 날개를 열었다. 두 상자의 열린 면끼리 맞댔다. 열어젖힌 날개면 한쪽에 목공풀을 발라서 맞댄 상자 안쪽면에 붙였다. 맞붙은 상자를 세로로 높게 세워 놓으면, 위에 붙은 상자가 뚜껑처럼 열리고 닫히는 구조였다. 그 안에 아이가 쏙 들어가 뚜껑을 닫고 숨을 수 있는 최적의 숨바꼭질 장소가 만들어졌다. 같은 방법으로 한 세트를 더 만들었다.
둘씩 붙은 상자 두 세트를 옆면끼리 맞붙게 세웠다. 4개로 길게 연결된 상자가 반으로 접힌 모양이라고 보고, 각 세트의 가장 밑바닥 면에 붙은 날개가 다른 편 상자 바깥쪽에 붙게 했다. 그러면 4개의 상자가 가로로 길게 연결된 형태로도 펼칠 수 있었다.
아이가 하원하고 오면 거실 작업 현장에서 놀면서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상자를 이어 붙일 때는 이틀 넘게 무거운 것으로 괴어 놓아야 제대로 고정됐다. 겨우 붙여 놓은 것을 수시로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며 본인이 어느 칸에 숨었는지 맞춰보라고 했다. 상자 겉면을 칠하기도 전에 이미 다 놀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본인만의 숨겨진 공간을 좋아했다.
4개의 상자가 하나의 커다란 상자로 보이게 색칠할 차례가 됐다. 가로세로 정사각형이 되도록 두 세트가 반으로 접힌 모양으로 세웠다. 육면체이기 때문에 숫자 캐릭터 6개를 엄선해서 그려야 했다. 아이와 상의 끝에 앞면은 넘버 1, 윗면은 넘버 2, 오른쪽 옆면은 넘버 3, 왼쪽 옆면은 넘버 4, 뒷면은 넘버 8, 마지막으로 접은 것을 기다랗게 폈을 때 보이는 안쪽면은 넘버 10으로 그렸다. 넘버 8은 보라색이고, 넘버 10은 별 모양 안경을 쓴 특징이 있다는 얘기를 나누며 너 한 번, 나 열 번, 붓질했다. 아이는 수다로 붓질했고, 나는 진짜로 붓질했다.
완성한 뒤에 영상을 촬영했다. 내가 카메라 화면 안에 상자 한 면, 한 면을 차례로 담으며 이동할 때마다 상자를 탁탁 두들겨서 신호를 줬다. 그때마다 상자 속에 숨어 있던 아이가
아임 넘버 1(I'm Number One).
아임 넘버 2(I'm Number Two).
아임 넘버 3(I'm Number Three).
아임 넘버 4(I'm Number Four).
아임 넘버 8(I'm Number Eight).
이라고 말했다. 넘버 8을 말하자마자 아이가 뚜껑을 열어서 서프라이즈(surprise)!,를 외치고 숨어 있던 자신을 드러내며 놀라게 했다. 다시 뚜껑을 덮고 상자 옆면이 바닥에 닿게 눕혔다. 그때 안쪽에 그려진 마지막 캐릭터가 기다랗게 드러났고, 아이가
아임 넘버 10(I'm Number Ten)! 텐, 텐, 테데덴~
이라고 외쳤다. 아이가 숫자가 되고, 그 속에 숨고, 모양이 바뀌는 상자가 되는 놀이는 꽤 재밌었다. 나는 집구석 다른 곳에 있다가도 엄마, 나 어딨는지 맞춰봐,라고 소리치는 아이 목소리가 들리면 '넘버블럭스 숨바꼭질 큐브' 앞으로 달려가 왼쪽 칸에 숨었나 오른쪽 칸에 숨었나 도무지 맞추지 못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살면서 시간을 끌어야 할 때가 있다면, 소중한 사람의 시간에 초대받은 때다. 우리의 기억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순간이라고 기록해놓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