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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박스 Oct 23. 2022

상자 근육 만들기

묵힌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과 맞붙은 몸도 새로운 자극으로 기름칠하고 싶어졌다.


여성 풋살팀에 입단했다. SNS에서 창단 멤버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봤었다. 처음에는 무심하게 스크롤바를 내렸다. 근데 왠지 잔상이 남아서 다시 스크롤바를 올리고 '좋아요'를 눌렀다. 광고 글을 클릭하고 채팅하기 버튼을 누른 게 입단으로 이어졌다.


첫 경기를 뛰러 갔다. 4번째 쿼터 초반까지 내가 속한 팀이 1:4로 지고 있었다. 경기 시작 전에 내 나이나 체력 지수 같은 건 슬그머니 공개하지 않았었다. 나의 헛발질이 점수를 잃는 데 큰 보탬이 되고 있었다. 내가 골키퍼를 맡은 시점에 우리 팀이 두 골을 먹기도 했다. 경기 종료 10분 전, 코치님이 골든골을 외쳤다. 그 전까지의 점수가 승패를 좌우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골든골을 넣은 팀이 무조건 이기는 거다. 내 오른발이 상대 진영 골대 안으로 슛을 날렸다.


내가 골든골을 터뜨렸다! 데뷔골이자 골든골! 팀을 승리로 이끈 골! 골을 넣는 장면이 눈 속에 슬로 모션으로 들어왔다. 상자 위에 크레이지 페인팅을 해댈 때 느낀 후련함과 같았다.


중력을 거슬러 뛰어다니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생 때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면, 840m를 전력 질주해서 간 다음 정거장에서 기어이 차를 타고야 말았다. 배차 간격이 길어서 절대 놓쳐선 안 되는 버스이기도 했지만, 굳이 쫓아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냥 뛰는 게 좋아서였다. 달리기를 할 때 내 몸은 땅에 곤두박질치기 직전 날개 쳐 오르는 새끼 독수리가 느꼈을 스릴감을, 거칠 것 없이 날아갈 것 같은 자유함을, 버스를 잡아 탔을 때의 쾌감을, 유유히 모든 신체 부위를 컨트롤하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풋살이라면 달리기처럼 온갖 무게로부터의 탈출을 경험시켜 줄줄 알았다. 하지만 경기를 뛴 다음 날 바로 오른쪽 무릎이 말썽을 일으켰다. 모른 척하고 한두 주를 더 뛰었더니 무릎이 제대로 굽혀지지 않았다. 염증으로 인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한 달 넘게 쉬어야 했고, 무작정 뛰는 게임보단 차근차근 근력을 키울 수 있는 운동을 하기로 했다. 나는 크로스핏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크로스핏 짐을 둘러봤다. 딱 봐도 40대는 없어 보였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극기 훈련 다녀온 사람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주방에서 거실로 이동할 때 벽을 짚고 이동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안 다닐 수 없게 만드는 중독성 강한 운동이었다. 예전보다 근력이 좋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크로스핏 8개월 차에 처음으로 밧줄 타기를 했다. 층고 5m 천장에 연결된 밧줄을 바라보며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팔을 단 한 번 옮겨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사람씩 봐주던 코치님이 내 옆에 왔다. 자, 해보세요. 손으로 밧줄을 잡고 발에 매듭을 엮어 섰다. 한 팔을 위로 뻗고, 발 매듭을 풀고, 다리를 접어 올린 뒤, 다시 발에 매듭을 엮고, 팔을 뻗어 더 위로 올라갔다. 엇, 되네???! 미끄러짐 없이 끝까지 올라가서 손바닥으로 천장을 터치하는데 성공!


내 카카오톡 메인 프로필에 밧줄 타는 영상을 올렸다. 그것을 본 친구에게 대단하다는 메시지가 왔다. 사실 한번 해낸 뒤로 힘이 다 빠져 버렸었다. 재도전에 실패했고, 2030의 근력을 따라잡긴 어려웠다고 말했다. 친구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이랬다.


40대 중에선 네가 짱일 거야!


곧 2030을 능가할 수 있을 거란 얘기는 없었다. 친구는 종종 현실에 뿌리박은 응원을 날리곤 했다.


손을 쓰고, 짐을 정리하고, 몸을 움직이고 나니 인생의 녹슨 부분이 조금 굴러갔다. 나를 쓰고 오늘을 쓰자는 다짐이 삶을 단순하게 정돈해줬다. 작업과 육아와 오늘을 사는 일은 체력전이다. 근육을 단련해야 아이와 미술 작업을 해낼 수 있다. 나는 오늘도 근육에 힘을 키우고, 택배 상자를 펼친다. 그러다 보면 나만의 상자 근육이 생긴다. 지금은 젤리 근육이지만 훗날 스톤 근육이 될 때까지 아이와 나의 장을 계속해서 펼칠 거다. 오늘 단련한 근력으로 오늘을 사는 하루살이지만, 밧줄 타기에 성공하고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뿌듯하다. 우영우가 회전문을 통과한 뒤 느낀 뿌듯함과도 같을 것이다. (feat. 우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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