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택배 상자로 무언가 만들어 볼 마음이 스멀대기 시작할 때였다. 수납장 안쪽에 묵혀둔 상자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사과 상자 정도 크기의 보관함 안에는 시카고 유학 시절 짐이 담겨 있었다. 수업 파일, 작업 노트, 미술관과 박물관 브로셔, 다운타운 지도, 지하철 노선도, 학생증과 몇 가지 기념품 등이 있었다. 나는 15년이 지나는 동안 그 상자를 들춰보기가 힘들었다. 졸업 후의 시간에 내 바람과 계획에 맞는 순풍이 불지 않았다. 내 속에서 시카고는 들춰봤자 다시 가 닿을 수 없는 형상으로 자리 잡혀 있었다. 그것을 섣불리 잠 깨울 엄두를 내지 못했고, 괜히 건드렸다가는 괴리감만 커질 게 뻔하다고 여겼다. 마음의 바다에 난파된 상자가 심해의 모래 속에 매몰돼 있었다.
끄집어 내자.
창고 공간 삼아 잡다한 것을 넣어 둔 수납장 문을 열었다. 여행 캐리어, 눈썰매, 텐트, 액자, 오리발 등 일관성 없이 엮인 짐을 다 뺐다. 내 짐 상자까지 빼고 나머지 물건을 다시 넣었다. 상자 속에는 무대디자인 수업 시간에 만든 무대 커튼을 그린 보드가 있었다. 입체 작품을 운반해오기 어려워서 커튼판만 떼 온 것이었다. 다시 보니 아마추어 같은 학부생의 작품이었다. 기억에 남아 있던 모습과 달랐다. 꺼내보니 별 거 아니네.
시카고에서 보낸 날들은 레드문 극단(The Redmoon Theatre)에서 올린 연극처럼 몽환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시카고 외곽에 위치한 레드문 극단에서 소품 제작 인턴으로 일했다.
레드문은 일상의 공간을 무대 삼아 극을 펼치곤 했다. 한적한 근교 공원이나 복잡한 도심의 대로변 어디라도 그들의 무대가 될 수 있었다. 레드문의 극이 펼쳐지는 장소는 순식간에 9와 3/4 승강장이 되었다.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은 호그와트 급행열차를 타고 마법의 세계로 들어갔다.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 한적한 공원에서 펼쳤던 'Twilight Orchard(2006년 10월 3일~9일)'다. 극의
제목은 '황혼 혹은 비밀스러운(Twilight) 과수원(Orchard)'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해가 진 어스름한 저녁에 공원 여기저기에 자리 잡은 배우가 꿈꾸는 여인, 늙은이, 생일 맞은 아이, 왈츠를 추는 남자와 여자 등으로 분해 각자의 세계를 연기했다. 관객은 자유롭게 공원을 산책하며 불쑥 나타난 뜻밖의 캐릭터를 마주하곤 했다. 커피 카트를 끄는 연기자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씩 건넸다. 저녁의 쌀쌀함을 녹인 관객은 가을바람을 닮은 고즈넉한 서커스의 한 장면에 초대됐다. 나도 관객의 한 사람으로 신비로운 정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시카고 다운타운 전체를 무대 삼아 열렸던 'Spectacle Lunatic(2007년 3월 2일)'도 가슴에 남아 있다. 저녁에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꼬박 밤을 새우는 축제였다. 여러 극단이 참여해 도심 구석구석을 무대로 연기했고, 그곳에 레드문도 참여했다. 버블버블 비눗방울처럼 두둥실 떠오를 것 같은 옷을 입은 등장인물, 서커스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듯 불을 뿜는 단원, 함께 어우러진 거리의 인파. 도시의 밤은 공중에 떠오른 투명한 방울처럼 땅에 발을 딛지 않았다.
공부하며 꿈꾸던 시절의 흔적을 끄집어 내 보니 생각보다 담담했다. 상자 속 물건을 버리는 것은 곧 꿈꾸던 시간을 버리는 것이라고 여겨왔는지도 모르겠다. 졸업 후에 꿈꾸지 않는 시간을 산 죄책감이 컸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버릴만한 것도 눈에 띄었다. 묵혀둔 상자를 정리하니 마음이 정리됐다.
짐을 정리하고 두세 달 뒤, 아이가 수 애니메이션 <넘버블럭스(Numberblocks)>에 흠뻑 빠져 버렸다. 아이와 해당 작품의 무대를 만들어서 공연해보기로 했다. 내게는 매일 돌아오는 작업 데드라인이 있었는데, 꼬마의 하원 전까지의 시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까지 밑 작업을 끝내 놔야 아이와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택배 상자로 무대를 만들되 짐 속에서 꺼낸 커튼 보드를 재활용하기로 했다. 무대 바닥과 벽면을 세우고 앞면에 커튼판을 고정시켰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스케치북을 거침없이 펼치더니 1부터 10까지의 넘버블럭스 캐릭터를 그렸다. 넘버 1은 빨간색, 넘버 2는 주황색, 애니메이션에 나온 특징을 놓치지 않고 그렸다.
그날 저녁 남편이 돌아온 시각, 나는 공연 스텝으로, 아이는 종이 인형 연기자로 <넘버블럭스>를 초연했다. 아이가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무대에 1부터 10까지의 캐릭터를 등장 혹은 퇴장시키면서 두서없이 즉흥적으로 스토리를 꾸며냈다. 피날레 노래도 즉석 해서 지어 불렀다. 공연 무대 앞에는 '넘버블럭스 절찬 공연 중'이라는 입간판을 내걸었다. 내 개인 SNS 계정에는 앤딩 크레디트를 달아서 공연 현장 사진을 업로드했다.
Stage Set Design: 엄마
Lighting: 엄마
Signboard: 엄마
Paper Puppets: 아이
Props: 아이
Storyteller: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