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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박스 Oct 23. 2022

그냥 네가 산타

녀석은 한글을 안 뗐고, 나더러 『내 멋대로 산타 뽑기(최은옥 글, 김무연 그림)』를 읽어 달라고 했다. 아이가 책 표지를 보자마자 덥석 집어 온 책이었다. 연말 시즌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내게 들이밀었다. 우리는 대형 서점에서 몸을 기댈만한 귀퉁이 아무 곳이나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목소리로, 아이는 귀로, 글밥 많은 초등 형아용 책을 다 읽었다. 그날 쉰 목소리 산타를 모집했다면, 곧바로 내가 뽑힐 태세였다.


이전에 한 적 없는 트리 만들기 이벤트 덕에 꽤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를 보낸 거라 여겼다. 해가 바뀌고, 봄이 오고, 꽃이 피었다. 아이가 느닷없이 산타 뽑기를 읽고 싶다고 했다. 사계절 크리스마스 모드인가. 간절함이 눈망울에서 뚝뚝 떨어지길래 책을 주문해줬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또다시 글밥 두둑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줬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읽어줬다. 책을 읽어준 내 소감은 아이가 7살이 됐으니 한글을 떼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리 집에서도 산타를 뽑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봄 산타는 과연 누구로 뽑힐까.


트리를 만든 뒤 택배 상자를 이용해 몇 가지를 더 만든 다음이었다. 미술 놀이가 정기적으로 이어지자 상자 외의 것들도 미술 재료로 보이기 시작했다. 새벽 배송 때 오는 신선 재료를 담는 보냉팩이 맘에 들었다. 견고하고 두툼한 팩이 언젠가 요긴하게 쓰이겠다 싶었다. 보냉팩으로 산타옷을 만들자! 산타옷을 입어보고 맞는 사람이 산타가 되는 게 우리 집만의 산타 뽑기 방식이었다. 보통 옷에는 사이즈가 있다. 아이 체구에 맞는 옷을 만들 예정이니 보나 마나 아이가 산타로 뽑히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모아 둔 보냉팩을 꺼내서 아이의 몸에 대충 대봤다. 사이즈를 정확하게 잴 필요 없이 몸통째 쏙 넣을 수 있는 넉넉한 점프슈트 형태로 제작할 예정이었다. 두세 장의 팩을 이어 붙이면 충분히 몸을 감쌀 수 있었다. 옷의 둘레를 어림짐작한 후, 길이로는 몇 장의 팩을 이어 붙여야 할지 살폈다. 밑위는 몇 장째 지점에서 끝나고, 바지 기장은 어느 정도로 할지, 팔소매는 어느 지점에서 이을지를 빠르게 훑어봤다. 필요한 보냉팩 개수를 센 뒤, 팩의 옆 이음매를 잘라내고 다른 팩과 연결시켰다. 산타옷의 몸통 둘레를 이어 붙이고 팔과 다리까지 잘 들어갈 수 있게 점프슈트를 만들었다.



특별히 보냉팩 안쪽에 둘러싸인 은박면이 겉으로 보이게 뒤집어서 작업했다. 빛나는 은박 위에 아이만의 빨간 패턴을 그려 붙여서 산타옷을 완성할 계획이었다. 나는 스케치북과 빨간 물감, 칠할 도구를 아이에게 건넸다. 원하는 데로 색을 칠해보라고 했다. 나뭇가지, 롤러, 끈 등 여러 도구를 활용해 빨간색을 칠했다. 아이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라면서 물감 묻힌 나뭇가지를 들고 점프하기도 했다. 레알 '액션' 페인팅이었다. 우리는 갖가지 터치의 빨간 종이를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처럼 오려보기로 했다. 바람과 달리 마티스 같은 유려한 가위질은 온데간데없고, 우리 맘대로 막 오린 빨간색 조각을 은박 산타옷에 붙였다. 마지막으로 옷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단추를 달았다. 자석 단추를 이용해 쉽게 여몄다 열 수 있게 했다.



오래전, 아이의 백일도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다. 그때 아기 산타옷을 입혀서 사진 찍었었다. 모자와 바디슈트가 세트인 산타복이었다. 기념이 될 만한 옷 몇 벌을 간직하고 있던 게 생각났다. 신생아 바디슈트는 당연히 안 맞을 테고, 모자는 맞는지 씌워 봤다. 억지로 욱여넣으면 머리 위에 얹혀 있긴 했다. 보냉팩 산타복을 입은 아이의 머리에 백일 산타 모자를 씌워 줬다. 이미 만들어 둔 택배 상자 트리를 옆에 세우고 사진 찍었다. 택배 상자 트리와 보냉팩 산타복은 잘 어울렸다. 우리는 그렇게 봄날의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엄마, 너무 더워! 벗을래!


오만 짜증이 얼굴에 가득했다. 네가 그러면 그렇지.... 아름다운 장면은 5분 30초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보냉팩 성능이 너무 좋았나 보다. 날이 너무 따뜻해진 탓일 수도 있었다. 아이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사진 몇 장 더 남길 틈을 주지 않고 아이가 산타복을 벗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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