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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박스 Oct 23. 2022

산타 만날 준비

트리를 완성한 뒤, 아이는 그 아래 놓일 선물을 기대하고 있었다. 해마다 추석 즈음 본인 생일에 선물을 열어 보면서 곧바로 크리스마스에 받을 선물을 정해서 세 달 가까이 노래 부르고 다니는 아이라고나 할까. 크리스마스가 하루 이틀 앞으로 다가오자 선물은 당연히 받을 거란 전제 하에 다른 준비에 분주했다.


아이가 산타 할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쌀 포장지를 사러 가자고 했다. 산타가 들어올 거실 창문 앞에 둘 거라고 했다. 도둑인가, 거실 창문이라니, 하고 생각하던 나는 굴뚝을 대체할 구멍으로 창문보다 나은 것을 찾기 어렵다는 데 수긍했다. 나는 아이에게 산타를 위한 선물이 뭔지 물었다.


산타 할아버지한테 치약이랑 사탕을 선물 줄 거야. 사탕 먹고 양치하라고!


병 주고 약 주나 보다. 그래도 몇 살 더 먹었다고 매년 받던 선물이 안 올 리 있겠냐고 생각한 듯했다. 산타를 기다리는 태도가 제법 여유 있어 보였다. 서너 살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루는 혼자 무언가 생각하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


내가 울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면...?


엄마의 직감으로, 아이가 '울면 안 돼' 캐럴 가사를 떠올렸다는 걸 알아챘다.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주신대'에서 뜨끔했던 거다. 한 해 동안 운 적이 많아서 선물을 못 받을까 봐 염려됐나 보다. 나는 산타가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아이를 타일렀다. 갖고 싶은 선물이 뭔지 덧붙여서 물어봤다.


(흑흑ㅠㅠ) 벤... 츠... (흑흑ㅠㅠ) 큰... 벤츠... (어흑ㅠㅠ) 또 작은... 벤... 츠....


아이의 대답에 나는 두 손을 맞부딪히며 웃었다.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은 자동차에 진심인 경우가 많았다. 아이는 시속 100km로 달리는 빠방의 뒷모습만 스쳐도 어느 회사, 어느 차종인지 알아맞히곤 했다. 그래도 벤츠가 갖는 의미까지는 알지 못해 순수한 본심을 내비쳤나 보다. 난 아이에게 오늘부터 아주 열심히 기도해야겠다고 했다. 한 대도 아니고 두 대라니.... 크리스마스가 코앞이었고, 초자연적인 신의 개입 없이는 소원을 이루기 어려워 보였다.    


아이는 진짜로 산타 할아버지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실제로 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나는 산타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산타의 도플갱어였다. 2013년 겨울,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그가 속한 무리에 함께 서 있었다.


컬러 트렌드 연구원으로 일했던 나는 연 2회 열리는 국제 컬러 회의에 참석하곤 했다. 이탈리아에서 온 할아버지도 참석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회의를 주관하는 기관의 오랜 멤버였다. 때는 기관 창설 50주년이 되는 해였고, 그도 해당 햇수에 버금갈 만큼 참석해 온 업계 장인이었다. 처음 이탈리아 할아버지를 봤을 때 정말 산타가 아닐까 의심했었다. 살짝 곱실거리는 백발의 단발머리, 코 밑에서 턱으로 이어진 덥수룩한 흰 수염, 배가 불룩한 항아리 체형. 그의 외모가 '나는 산타'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위트도 넘쳤다.


본격적인 회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든 참가자들이 전날 저녁에 모여 리셉션을 가졌다. 개최 지역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을 둘러보고 저녁을 먹는 일정이었다. 독일 하면 맥주, 맥주 하면 호프집이다. 안내자는 일행을 호프집 앞으로 인도했다. 맥주 숙성 통 하나가 세워진 입구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알리는 산타 할아버지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조상은 숙성 통보다 약 1.5배 큰 크기였다. 그때 이탈리아 할아버지가 산타 옆에 나란히 서서 말했다.   


히 이즈 마이 파더(He is my father)!


나는 배꼽을 잡고 바닥에 거의 주저앉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닮아 보였나 보다. 완전히 KFC 치킨 가게 풍경이었다. 예전에 KFC 관련 보도 사진을 본 적이 있다. KFC 가게 앞에 늘 세워져 있는 창립자 할아버지 조각상을 알 거다. 바로 옆에 실제 인간 할아버지가 조각상과 똑같은 흰 정장에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서 있는 장면이었다. 그날 나는 KFC 보도 사진의 산타 버전 현장에서 '히 이즈 마이 파더'를 들었다. 그처럼 타고난 외모라면, 가업을 충분히 잇고도 남을 만해 보였다. 산타로 빙의한 이탈리아 노인은 유머를 날릴 만한 타이밍을 호시탐탐 노리곤 했다.


노인의 파더(아버지)라면 내 아이의 벤츠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을까. 어린아이 시절엔 '산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이 뭐니'라는 질문을 받곤 했지만, 크고 난 뒤엔 '1억이 생기면 뭘 할 거니'라는 물음을 받는 게 현실이 됐다. 나는 산타를 만나면 뭘 받고 싶은지, 나에게도 삶을 들뜨게 하는 순진한 간절함이란 게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택배 상자로 트리를 만든 그 겨울, 크리스마스를 맞아 아이와 마술쇼에 다녀왔었다. 무대 위 마술사가 길이 30~40cm쯤 되는 단단한 원기둥 종이통을 내보이며 꼬마 관객들에게 물었다.


이 통 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요? 힌트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아이들이 앞다퉈 외쳤다.


커피!!! 돈!!!


풉, 돈이라니, 아이들은 역시 사람을 잘 꿰뚫는군. 나는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수긍 반, 씁쓸함 반을 담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동심이 흑심에 치닫던 중 정답은 와인으로 밝혀졌다. 와인병 색깔을 감쪽같이 바꾸는 마술이었다. 유아 마술쇼 아이템으로 웬 와인병.... 돈에 놀란 나는 와인병에 또 놀랐다.


아이들은 어른들도 여전히 가슴속에 산타를 품고 있다는 걸 알까. 산타는 소망과도 같은 거니까 말이다. 내가 아이만 할 때는 유치원에 찾아온 산타를 보고 홀딱 믿어버렸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 아이는 산타가 선생님들 중 한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산타의 정체나 존재 유무를 자꾸만 확인하려 들었다.


산타 할아버지는 햄스터네.


5살 때 아이가 말했다. 밤에 일어나고 낮에 자는 햄스터의 행동 패턴이 밤에 선물 주고 가는 산타의 것과 닮았다는 의미였다. 그러다 한두 살을 더 먹고 나니 산타를 추측하는 것만으론 모자랐나 보다. 직접 산타를 뽑으려 했다. 그 겨울, 아동 도서  『내 멋대로 산타 뽑기(최은옥 글, 김무연 그림)』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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