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배 어딘가쯤에 아기가 자리 잡은 지 16주 즈음되었을 때였다. 갑자기 비치는 출혈과 함께 극심한 아랫배 통증이 찾아왔다. 주기적으로 느껴지는 통증의 강도는 생각보다 강했고, 동반된 오한으로 인해 위 아랫니는 딱딱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혔다. 이불속에서 잔뜩 웅크린 채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가 방문한 병원에서 자궁 수축검사와 초음파, 그리고 자궁 경부 길이를 재는 검사를 받았다.
검사 결과, 자궁근종으로 인한 통증과 출혈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한 원인은 알 수 없다며, 조산기가 있으니 20주가 될 때까지 입원을 하거나 집에서 누워만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갑작스러운 입원 권유에 당황스러워 선뜻 대답을 않고 있자 내 안색을 살피던 의사 선생님이 조금 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화장실 갈 때, 밥 먹을 때 말고는 침대에 누워 있겠다고 약속하면 집에 보내줄게요. 지키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지금 입원합시다.
선생님께 굳게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작된 침대 생활. 아마 첫날의 반나절쯤은 침대에 모로 누워 눈물만 흘렸던 것 같다. 또 온갖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맘 카페를 뒤져봤고, 혹여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한 산모의 글을 보기라도 하면 채 마르지도 않은 눈물 자국 위로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조산 방지에 좋다는 연근칩과 호박손즙을 침대 머리맡에 늘 상비해두고 먹었고, 식사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에는 정말 누워만 있었다. 당시 아기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정말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날이 좋은 봄날에 나는 열심히 눕고, 먹었다.
의사 선생님과 약속한 날짜가 되어갈 즈음 다시 병원을 찾아 검진을 받았다. 현재로서는 출혈도 멎고 통증도 사라진 상태니 가벼운 외출은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침대에 갇혀있던 끔찍한 3주가 이제 끝이 난 거다. 누군가는 부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눕게 된 이유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나에겐 정말로 힘겨운 3주였다.
아무튼 안심되는 마음과 함께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감추며, 제일 하고 싶은 일이었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마시기’를 하러 병원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가 깨지게 시원해 보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카페 창문을 배경 삼아 커피잔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남편과 친구들에게 사진을 전송하며 ‘드디어 눕눕 생활 해방, 카페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머지않아 휴대폰에 뜬 친구의 카톡. ‘진짜 다행이다. 야 근데 임산부가 커피 마셔도 됨?’
이 무슨 다 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코 빠뜨리는 소리인지. ‘아 당연하지. 하루에 한잔은 가능.’이라고 답을 보내긴 했지만 갑자기 괜스레 찜찜한 마음이 들어 마주 앉은 아메리카노 잔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지인들의 걱정 어린 참견들을 귓등으로 잘 넘기고 지내왔지만 그날만큼은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에 순식간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혹시 아팠던 이유가 이틀에 한 번씩은 마셔왔던 커피와, 임산부가 먹으면 좋지 않다는 이런저런 음식들의 영향이 있었던 걸까? 커피를 마셔도 된다고는 하지만 안 마시는 게 더 나은 건 명백한 사실이 아닐까? 내 선택이고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커피 한 잔을 참지 못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나?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한 김에 이것도 포기해버리면 마음 한구석 작은 짐을 더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가만히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 잔을 노려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 생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더 이상 생각의 방향이 이쪽으로 흘러가게 두면 안될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먹고 마시는 것들이 아이의 안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건 나 자신도 명백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컨디션이 안 좋아질 때마다 나를 탓하는 습관이 아이를 낳고 난 이후에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 생각하니 아찔했다. 이 커피 한 잔이 아주아주 간접적으로 아이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자책은 명백히 나와 아이, 둘 모두에게 분명 직접적이면서 부정적인 영향을 줄 거였다.
이후로 나는 몇 번 정도 더, 사실 어제까지도 “임산부가 왜 자꾸 매운 걸 먹어?”, “해물 같은 건 먹지 말라던데.”, “찬 것 좀 줄여.” 등의 걱정(?)이 담긴 질문 아닌 질문들을 여럿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구구절절 하루에 카페인 몇 mg까지 가능하고, 해물도 잘 익혀 먹으면 관계없다는 등의 변명 같은 대답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상대를 향해 눈을 흘기고 앞니를 슬쩍 드러내며 말한다.
“야.. 엄마인 내가 알아서 해.”라고.
아가 걱정은 배불뚝이 엄마가 제일 많이 한답니다. 다들 걱정은 잠시 넣어두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