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이 편히 머무는 탈속(脫俗)의 절
법주사는 속리산의 넓은 품속에 있다. 속리산(俗離山)이란 이름 또한 천년고찰에 잘 어울린다. 속세를 떠나서 법(法)이 머물 수 있는 이곳이 바로 법주사인 것이다. 가까이에 큰 길이 새로 뚫리면서 이제는 사람들이 보다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옛날에는 깊은 산중에 있어 쉬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무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법주사를 다시 찾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 방문지 중 하나였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탓인지 어릴 적 다녀왔던 법주사의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보기 흉하게 시멘트가 발린 거대한 불상의 모습과 팔상전을 배경으로 친구들과 찍었던 기념사진만이 그때를 추억하게 한다.
법주사 일주문에 이르는 울창한 숲길이 시원하니 참 좋다. 정식 명칭은 속리산 세조길인데, 조카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비정한 군주였던 세조의 이름을 딴 것을 마뜩찮아 하는 목소리도 많다. 숲길의 길이가 5리쯤 된다고 해서 오리숲길로도 불린다. 참나무와 소나무, 전나무가 한데 우겨져 하늘을 가린다. 이 멋진 숲길이 아니었다면 더위 때문에 중도에 법주사 소요(逍遙)를 포기 했을지 모른다.
시원한 그늘 속을 걸으며 불어오는 한줄기 바람에 땀을 식힌다.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기분으로 법주사를 향해 걸음을 옮겨 본다. 평일이라 한적하다. 속세를 잠시 떠나 마치 선계(仙界)에 발을 들인 느낌이다. 깊은 산중에 있으나 평지에 놓여 있는 덕분에 남녀노소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절에 닿을 수 있으니 미륵대불의 자비로움을 쏙 빼닮은 절이라 하겠다.
숲길 군데군데에는 흥미로운 스토리텔링과 생태체험을 즐길 수 있는 시설물을 조성해 놓았다. 당 태종이 중국대륙의 기운을 한반도에 빼앗길 것을 염려해 속리산 거북바위의 목을 자르고 등 위에 탑을 세웠다는 수정봉 거북바위도 있고, 잠시 멈춰 속리산에서 탈속의 즐거움을 만끽했던 화담 서경덕의 시도 읊어볼 수 있다. 세조가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씻었다는 목욕소, 속리산의 깃대종인 망개나무와 하늘다람쥐도 속리산 숲길 산책에서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일주문의 큼지막한 현판이 제일 먼저 반겨준다. 법주사는 조계종 제5교구의 본사인데 고려시대 법상종(法相宗)의 중심 사찰이었다. 법상종은 통일신라시대 때 성립된 불교 종파인데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화엄종과 더불어 교종의 2대 종파가 되었는데 이자겸의 난 이후 교세가 많이 위축되었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법을 구하러 천축국으로 떠났던 의신조사가 돌아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 지을 터를 찾아다녔는데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자 나귀가 더 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돌았다고 한다.
스님이 주변을 살펴보니 절을 지을 만했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고 해 절 이름을 법주사(法住寺)라 했다. 이후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중창하고부터 대찰의 규모를 갖추었다는 것이 사적기(事績記)에 적힌 법주사의 내력이다. 하지만 진표율사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삼국유사는 또 다른 설화를 전하고 있어 그 정확한 역사를 규명(糾明)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주문을 지나면 멀리 금강문이 눈에 들어온다. 법주사는 평지에 오밀조밀하게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어 볼거리가 많다. 금강문 바로 뒤에 쌍둥이처럼 높게 솟아 있는 나무도 참 특이하다. 곧이어 나오는 천왕문을 지나면 그 유명한 법주사 팔상전(八相殿)을 만날 수 있다.
사진으로 많이 접했던 건물인데도 실제로 보니 일반적인 사찰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라는 걸 새삼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으로 높이가 22.7미터에 달하며, 1962년에 국보 제55호로 지정되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때 중건을 시작해 인조 4년(1626)에 완성을 보았다고 한다. 숱하게 많은 전란(戰亂)을 겪었던 이 땅의 아픈 역사가 곳곳의 문화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팔상전은 돌로 정사각형의 단층기단을 짜고 사방에 계단을 낸 형태다. 1층 탑신의 사방에는 출입구가 계단과 통하게 되어있어 어느 곳에서나 출입이 가능해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건물의 내부는 기둥의 네 면을 벽으로 처리해 팔상도(八相圖)를 걸었고 불단을 만들었다.
벽의 사방에 각 2면씩 모두 8개의 변상도가 그려져 있다 해서 팔상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1968년에 해체복원 공사를 했는데 그로부터 또 반세기의 세월이 흘러서인지 고풍찬연(古風燦然)하다. 목조건물 이다보니 손이 많이 가고 신경이 쓰일 것 같다. 많은 문화재들이 화재로 소실되곤 하는데 팔상전만큼은 지금 모습 그대로 온전히 유지되었음 하는 바람이다.
팔상전과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사이에는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 국보 제64호인 석련지, 보물 제15호인 사천왕석등, 보물 제216호인 마애여래의상 등 수많은 문화재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이밖에도 철로 만든 솥인 철확(보물 제1413호),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등 절 전체가 보물이요 박물관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법주사를 둘러보는 데 하루가 모자랄 것 같다.
법주사 쌍사자석등은 팔상전 서쪽에 있는 사천왕석등과 함께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석등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높이가 3.3미터에 이르는데 단단한 화강암(花崗巖)을 가지고 마치 찰흙 주무르듯 갈기와 다리의 근육까지 생생하게 표현한 장인(匠人)의 기교(技巧)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암수 한 쌍이 가슴을 맞대고 석등을 받쳐 들고 있는데 하대석을 버티고 있는 뒷다리와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 앞다리 모두 힘이 넘친다. 자세히 보면 사자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 마리를 다물고 있어 그 연유가 궁금해진다.
팔상전 외에 관심을 끄는 대상이 법주사에 더 있다. 그중 하나가 천왕문을 지나 경내 왼쪽 편에 우뚝 서 있는 철 당간지주다. 현재 철 당간은 30단의 철통을 연결하였는데 그 높이가 22미터에 이른다. 팔상전의 높이와 비슷하다. 고려 목종 9년(1006)에 처음 건립하였고, 구한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주조(鑄造)하기 위해 무너뜨렸었다. 그 이후에 몇 차례 복원하였으며 지금의 철 당간은 1972년에 복원된 것이라 한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세계 최대의 금동입상(金銅立像)인 법주사 미륵대불이다. 높이가 무려 33미터인데 아파트 11층 정도 높이다. 대불 앞에 서는 순간 모든 중생들은 그 거대함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의 기억으로는 자비로운 부처님의 따사로움이 아니라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가 위협적으로만 느껴졌었다.
기록을 찾아보니 이 미륵대불도 사연이 참 많았다. 원래 신라 혜공왕 때 금동으로 조성했으나 조선시대 고종 9년(1872)에 경복궁 축조자금으로 쓰기 위해 뜯어냈던 것을 1939년 불상 복원을 시작해 1964년에 옛 용화보전 자리에 시멘트로 미륵대불을 완성했다. 1990년에는 시멘트 불상을 헐어내고 청동대불을 세웠고, 2002년에는 그 오래 전 진표율사가 금동미륵대불을 모셨다는 기록에 따라 개금불사를 완성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청동대불을 만드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로 이어지는 청동불상을 만든 사례가 세계적으로도 드물었기 때문에 관련 전문가들도 함께 참여하였고, 쓰인 청동의 양만 116톤이나 되었다니 엄청난 불사(佛事)였다 할 만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불상의 외관에 얼룩이 생겨 위엄(威嚴)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탓에 금박을 입히는 개금불사(改金佛事)가 불가피해졌는데, 총 80kg의 순금이 들었다고 한다.
대불 아래로 내려가면 지하에 용화전이라는 큰 법당이 있다.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법당을 둘러싸고 있는 벽면에는 개금불사(改金佛事)에 시주했던 신자들의 이름이 적힌 불상들이 빼곡하게 모셔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절은 화려하기보단, 소박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것도 어쩌면 절은 산속에 있어야 어울린다는 생각처럼 편견(偏見)일 수도 있겠다. 절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겉모습이 어떻든 그 마음만 참되고 진실 되면 그만 아닐까.
빨리 나가라고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발길은 어느새 법주사 경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뙤약볕 아래 한참동안 경내를 돌아다녔더니 서늘한 숲길이 이내 그리워졌다. 이렇게 돌아서면 또 구석구석 챙겨보지 못하고 왔다는 아쉬움이 짙게 남겠지만, 또 그런 아쉬움과 다시 찾게 될 그날에 대한 기대를 반복하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콧노래를 나지막하게 흥얼거리며 숲길로 들어선다. 그새 그늘이 더 짙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