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번째 창업 이야기
사람의 마지막은 언제나 고요하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한 사람의 생이, 한 사람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그 고요의 끝자락에서, 세상의 이면에 자리한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는 일을 택했다. 바로 장례지도사라는 직업이다.
첫 번째 창업, 작은 장례식 ‘꽃잠’. 깊은 잠을 뜻하는 순우리말이자, ‘일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원히 기억될 깊은 잠’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내가 장례지도사라는 길을 처음 마주하게 된 것은, 가족의 고독사 때문이었다. 소식은 너무 늦게 들려왔고, 그 방에는 오래된 사진 몇 장과 식은 공기만이 남아 있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자료를 찾던 어느 날,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는 장례비용이 부담스러워 ‘제대로 된 이별’조차 치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죽음은 멀리 있지 않았다. 고독사, 무연고, 그리고 누군가의 조용한 퇴장은 결코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다짐했다. 이별이 상업의 대상이 아니라, 존엄의 형태로 남게 하리라.
장례는 남은 자들의 의식이다. 사람들은 ‘마지막’이라는 단어 앞에서 격식을 차린다. 그러나 그 격식은 때로 고인을 가리고, 유족을 지치게 한다. 가득 들어선 화환, 형식적인 조문, 끝없는 문상 속에서, 정작 고인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진다.
문득 1998년, 추운 겨울이 내 마음을 스친다. 내가 처음 마주한 장례식의 기억이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매서운 칼바람에 귀가 시뻘겋게 얼어붙은 채, 시골집 마루 한켠에서 장례를 지켜보았다. 그날의 주인공은 증조할머니였다. 집안은 사람들의 울음과 곡소리, 그리고 부엌에서 피어오르던 육개장의 붉은 김으로 가득했다. 장손인 나는 그저 고요히,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곱게 화장한 할머니는 수의를 몸에 두르며, 마치 누에가 고치를 천천히 감싸듯, 은은하게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 신비롭고 숭고한 순간 앞에서 나는 숨조차 고르기 어려웠다. 그리고 꽃상여에 오르신 할머니가 먼 길을 떠나실 때, 내 마음속에 문득 스쳐간 생각이 있었다.
‘우리 할머니, 곱게 단장하시고 하늘로 시집가시는구나’
그날의 장례 풍경과 할머니의 마지막 길은, 오랜 세월 내 마음 깊이 잔잔히 남아 지금까지도 살아 숨 쉬는 기억이 되었다. 그 경험은 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장례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과 존엄을 담아내는 마지막 예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현실 속 장례는 때때로 화려한 형식과 관습 속에 가려, 고인과 유족이 느껴야 할 진심과 감정이 희미해지곤 했다. 나는 그 틀을 바꾸고 싶었다.
그때 나는 입관식은 마치 한 편의 연극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인은 주인공이 되고, 유족은 숨죽인 관객이 되며, 장례지도사는 마지막 장면을 섬세히 연출한다. 눈물과 감사, 그리고 사랑이 교차하는 찰나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비로소 완성된다.
그래서 나는 ‘작은 장례식’을 만들었다. 형식보다 마음이 중심이 되는, 100인 100색의 장례. 정해진 틀 없이, 단 하나의 진심으로 만들어가는 맞춤 인사. 그 여정에는 독립영화감독, 플로리스트, 문화예술강사, 은퇴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함께했다. 우리는 장례를 ‘예술’로 다시 쓰며, 한 사람의 생이 한 편의 시가 되고, 그 시가 꽃과 빛으로 피어나는 시간을 만들었다.
코로나 이후, 장례의 풍경은 달라졌다. 사람들은 점차 ‘간소화된 장례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게 ‘작다’는 결코 ‘가볍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로 돌아가는 일, 슬픔의 중심을 다시 ‘사람’에게 돌려주는 일이었다. ‘작은 장례’는 그렇게, 세상에 스며드는 조용한 변화가 되었다.
나는 늘 죽음의 가장자리를 걸었다. 아이의 관 앞에서 느꼈던 정적, 여성 상주가 허락되지 않는 사회의 시선, 휠체어 때문에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는 장애인 유족의 모습. 그때마다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나는 ‘무장애장례’, ‘여성상주’, ‘어린이장례’라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다. 누구의 죽음도, 누구의 애도도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그 길은 언제나 무거웠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청년의 장례, 어린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의 추모식. 그런 날이면 내 마음도 함께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의 슬픔을 함께 안아주고, 그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렇게 드러난 고통은 더 이상 혼자 짊어질 짐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꽃잠’이 지닌 또 다른 의미이자, 역할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흐름 속을 흘러간다. 수많은 도전과 모험을 지나,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찾아왔다. 가슴 한편이 서글펐다.
“The course of true love never did run smooth.”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속 한 문장처럼, 진정한 사랑의 길이 순탄치 않았듯, 나의 도전과 열정 또한 평탄하지 않았다. 그 아픔은 중학교 시절 사랑니를 앓았던 기억처럼 오래도록 뼈아프게 남았다. 잠을 설치며 견뎌야 했던 밤들, 만남과 헤어짐은 참으로 어렵고, 그만큼 가슴이 쓰라렸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럼에도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어주던 동료들이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함께 웃어주던 그들의 따스한 손길 덕분에, 나는 버틸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마치 사랑니가 잇몸을 뚫고 천천히 자리를 잡듯, 그들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나를 단단하게 세운 힘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꽃잠의 동료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함께한 시간은 단지 한 시절의 추억이 아니라,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준 소중한 자산이었다. 이제 그 시간을 마음에 아름답게 간직하며,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 한다.
시간이 흘러, 나는 또 한 번 새로운 출발점 앞에 섰다. 죽음을 다루던 첫 창업은 내게 ‘삶’의 본질을 가르쳐주었다. 한 인간의 생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세상에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말이다.
이제 나는 ‘닥터파브르(Dr.Fabre)’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도전을 이어간다. 곤충이라는 생명의 순환을 통해 인류의 미래 먹거리와 지속가능한 생태를 탐구하며, 죽음을 통해 배운 ‘존엄’과 ‘생명’의 가치는 이번에는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힘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나는, 영원히 기억될 깊은 잠에서 배운 것들을 품고 다시 한번 삶의 무대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