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슈가 Nov 26. 2022

다이소 곰돌이 줄자 때문에 울다

이사는 힘들다. 이사 자체도 힘들지만, 나처럼 내가 들인 물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이사 전 물건을 버려야 한다는 강박에 힘들다. 계속 같은 집에 살면 묵은 짐정도는 눈 질끈 감고 살 수 있겠지만 이사 한다고 생각하면 쓰지 않을 짐을 가져 가서 공간을 차지하게 하는 것 또한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사는 힘들다.


평수와 공간 구색이 다른 집으로 가는 이사였을 것이다. 신혼 때 해온 붙박이 장을 가져갈지 이 참에 버리고 갈지 정해야 했다. 이사 들어갈 집에 사는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이즈를 재기 위해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다이소 곰돌이 줄자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원래도 숫자에 약한 편인데 길이를 잴 때도 대충대충이었다. 이렇게하면 이 숫자가 나오고 저렇게 재면 저 숫자가 나왔다. 서둘러 치수를 재고 나왔는데 맞게 적어온 건가 싶었다. 이사를 안 다니면 안 해도 될 일이었다. 소질 없는 일은 이제 그만 하고도 싶었다. 상상력을 동원해 이사 갈 집의 안방 벽면 크기를 가늠을 해보려고 줄자를 확 뺐을 때였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제제하다 님 블로그)

곰돌이 코를 누르면 도르르 말려서 촤르르 감기곤 했던 줄자가 어째서인지 그대로 있었다. 코를 아무리 눌러도 나온 줄자 부분이 촤르르 말려 들어가지 않는다. 이번엔 살살 손으로 어떻게든 말려 들어가게끔 유도해보았으나 미동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그러는 거겠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스스로 달래는 말을 하고 정수기에서 물한잔 내려서 천천히 식탁으로 왔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아까의 행동을 반복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아무리 곰돌이 코를 눌러대도 힘없이 길게 늘어뜨려진, 나와있는 줄자가 촤르르 말려 들어가지 않았다.    


생명이 유한한 것들이 이별을 고하면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이겠지만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느냔 말이다. 유한한 것은 말 그대로 유한한 거니까. 내가 어찌할 도리 없으니까. 


그런데, 이사 때 늘 나와 함께 했던 이 귀여운 갈색의 다이소 곰돌이 줄자는 다르다. 또 거실 한쪽에 놓인 내가 출근하면서 급하게 빨래를 널어도 돌아올때면 빨래를 말끔이 말려놓고 나를 기다리는 미니 건조대의 날개는 달랐다. 이들은 유한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잘만 썼다면, 조심했다면 얼마든지 나와 더 오래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새것이 줄수 없는, 그 간의 우리집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안방 벽 치수 하나 제대로 못재는 나 자신에게 짜증을 내지 않았더라면, 짜증을 내며 곰돌이 줄자를 확 잡아당기지만 않았더라면 가성비 좋은 곰돌이 줄자가 그렇게 빨리 생을 마감할 리 없었다.


늘 이사는 이사 다니는 이에게 불리했다. 계약할 때는 좋게 좋게 했어도 나갈 때 집주인 얼굴은 달랐다. 이번 집주인은 특히 그랬다. 안하무인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보일러에 물이 뚝뚝 떨어져 집이 상할까 우선 수리를 해놓았더니, 그건 세입자 잘못이란다. 기온이 급 하강할 때 보일러를 틀어서란다. 서울에 집이 몇 채나 있으면서 이 정도 비용을 내기 싫어하는 강성의 집주인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어 버렸을 때 내 주머니에 곰돌이 줄자가 있었다. 매끈한 곰돌이 볼 부분을 만지작 거리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사에 필요한 물품을 사러갈때 가지고 나가 한 번씩 꺼내서 보면 귀여움에 미소가 지어졌다. 바쁜 남편도 못해준 내 이사 메이트였다. 


그런 곰돌이 줄자는 이제 나와 함께 하기 어렵게 되었다. 한동안 서랍 속에 있다가 이사 전에 버려질 것이었다. 줄자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줄자를 구태여 이사 가는 집까지 가져갈 만큼 현실 자각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곰돌이 줄자는 또 살 수 있었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면 비슷한 것이라도 구하자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몇 년을 몇 번의 이사를 나와 함께했던, 내편이 되어준 곰돌이 줄자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새 곰돌이 줄자는 그간의 이야기를 모른다. 


이사를 가기 전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들어있는 서랍을 몇 번 열어 보았다. 그 곰돌이 줄자에게 인사했다. 살짝 뭉클했던 것도 같다. 다짐했다. 앞으로 내가 들인 내 물건들 더 오래오래 쓰기 위해 더 아껴주겠노라고. 홧김에 줄자를 확 잡아당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누군가가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고 억지를 부리는 행동을 한다고 해도. -끝- 

매거진의 이전글 운명을 거스르고 김치 냉장고를 쟁취한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